“문화·예술계에 블랙리스트 조사권 달라”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1 13:53
  • 호수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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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블랙리스트 감사 결과 발표…문화·예술계 “매우 부실” 반발

 

6월14일 밤 10시,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극단 고래’ 연습실에서 연극인들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엔 촛불정국 동안 광화문광장에 설치됐던 ‘블랙텐트’의 극장장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와 블랙리스트 작성에 참여한 인사 명단을 정리하는 검열백서위원회 위원장 김미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후속 대책 마련을 위해 4월 출범한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블랙타파)’ 소속이다. 약 3시간에 걸쳐 이뤄진 이날 회의 안건은 전날인 6월13일 감사원이 내놓은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감사 결과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고 향후 대응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4월19일 문화·예술인들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헌법소원 청구서 제출’ 기자회견을 열었다. ⓒ 사진=연합뉴스

 

감사원 “관련자 징계 요구” 연극계 “솜방망이”

 

감사원은 6월13일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문체부가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실의 지시를 받아 지속적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사실 등을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12월 국회가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에 대해 감사를 요구해, 감사원이 1월19일부터 3월10일까지 두 달간 문체부를 상대로 기관운영감사를 진행한 결과다.

 

6월14일 긴급회의에 참석한 연극인들은 400쪽이 넘는 감사원 감사 자료를 인쇄해 한 줄 한 줄 형광펜으로 칠해 가며 적시된 사안을 꼼꼼하게 파악했다. 기존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자료 속에서 발견될 때마다 이들은 ‘충격적’이라며 연신 놀라움을 표했다. 김미도 교수는 “블랙리스트에 함께 반발했던 연극계 동료 일부가 이번 감사 결과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돼 매우 착잡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감사원은 박근혜 정부 당시 부당하게 문화예술인·단체에 대한 지원을 배제한 사례가 문화·예술 417건, 영화 5건, 출판 22건 등 총 444건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이전에 특검이 수사를 통해 발표한 374건보다 더 많은 수치다.

 

감사 자료에 따르면, 2014년 3월부터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은 문체부를 통해 지원 사업 신청자 명단을 사전에 송부 받았다. 그리고 특정 인사나 단체를 선정하거나 명단에서 배제한 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출판진흥원) 등 10개 산하기관에 그대로 이행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문예위는 기관들 중 가장 많은 364개 문화예술인 및 단체에 대해 사업계획서 부실 등의 이유를 들어 지원을 배제했다.

 

감사원은 이러한 감사 결과를 토대로 문체부 직원 19명, 한국관광공사 직원 2명, 한국마사회 직원 3명 등 관계자 28명에 대한 징계를 요청했으며, 문예위 등 4개 산하기관장에 대해선 주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인 문화·예술계에선 이에 대한 강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징계 수위가 지나치게 낮아 사실상 ‘봐주기’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블랙타파 소속 연극인들은 회의 과정에서 “저지른 일에 합당한 높은 징계를 요구하는 것이 핵심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는 “주의로 끝날 사안이 결코 아니다”라며 “블랙리스트를 앞장서 실행한 문예위 박명진 위원장 등 몇몇 단체 수장들은 구속 수사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문화·예술인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미도 교수는 “이전 정부에 부역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이 아직도 문체부나 그 산하기관 직원으로 문화예술 지원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실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더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들은 정서적으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체부의 행위에 대해선 별도로 강하게 문제제기를 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훌륭한 예술인을 키워낸 어머니들에게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 선정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한 일을 비롯해,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생활고로 사망한 후 가난한 예술인을 돕기 위해 설립된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 과정에서 특정인과 단체를 배제한 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대표는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총괄적으로 파악한 후 촛불정국을 함께한 각계 문화·예술인 단체인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와 의견을 모아 예술계 전체 차원에서 적절히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약속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都 장관 “진상조사위 구성, 백서 작성할 것”

 

문화·예술인들은 이번 감사원 감사 발표가 결코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의 끝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촛불정국 동안 광화문광장 문화·예술인 텐트촌을 지키며 블랙리스트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송경동 시인은 6월13일 시사저널과의 전화통화에서 “우리 문화·예술인들을 이번 감사원 감사 결과에 조금도 감사(感謝)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송 시인은 “국정 농단 재판 과정에서 나온 사실에도 못 미칠 만큼 매우 부실한 감사”라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올해 1월에야 국회 요구로 감사를 시작한 감사원이야말로 감사가 필요한 곳”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감사 자료에 빠져 있는 수많은 블랙리스트 연루자들이 더 있을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블랙타파 측은 “특검과 언론에 아직 이름 석 자 거론된 적 없는 블랙리스트 관계자들이 많을 것”이라며 이번 감사원 자료를 바탕으로 좀 더 세세하게 정황을 파악한 뒤 관계자들의 실명을 넣은 자료를 추후에 별도로 공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조속히 정부 차원의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야 한다고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대선 과정에서 이와 관련해 진상조사를 강조하면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문화계와 공정성 협약을 맺은 바 있다. 6월16일 임명된 도종환 신임 문체부 장관 역시 6월14일 진행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관련한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백서도 작성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화·예술인들은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면 문화계에 확실하게 조사권을 보장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미도 교수는 “관계자 색출과 처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원활한 자료 열람과 철저한 조사를 위해 조사권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과거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때처럼 조사권과 수사권을 두고 정부와 갈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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