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청춘들의 자화상 ‘컵밥 공화국’
  • 김유진 푸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6.23 10:33
  • 호수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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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의 시사미식] 시간에 쫓기고 돈에 쪼들리는 고시생들의 일용할 양식 컵밥·도시락, 그리고 국수

 

노량진역에선 세 가지 향이 난다. 물비린내, 땀내, 그리고 책 냄새. 사람은 또 어찌나 많은지 출퇴근, 아니 등하교 시간에는 도로 위를 동동 떠다닐 정도다. 역을 나서면 학원 장벽이 펼쳐진다. 입시·고시·공무원 등등. 세상의 모든 학원은 다 모아다 놓은 모양새다. 1970년대부터 하나둘 모인 전문 학원들이 한때는 300개를 넘나들었다. 노량진을 가보지 않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화장실 낙서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수많은 청춘들이 생산인구로 당당히 편입될 날을 꿈꾸며 노량진으로 몰려들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백반집·포장마차·노점들이 테트리스 블록처럼 촘촘히 들어차 있다.

 

그 유명한 노량진 노점도 진화를 거듭했다. 떡볶이·호떡·어묵 위주의 간식에서 베트남 쌀국수와 야키소바(일본식 볶음 국수), 오야코동(닭고기와 계란을 이용해 만든 덮밥)까지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그렇게 다양함 속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던 이곳에 분쟁이 생겼다. 불경기가 심화되자 노점과 지근거리의 매장 오너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컵밥’이 발화점이다. 혜성처럼 등장한 컵밥은 노량진 젊은 청춘들의 발걸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착한 가격과 푸짐함, 그리고 주문 후 1분도 되지 않아 내주는 스피드 덕분에 노량진 노점 상권을 제패했다.

 

노량진 학원가 앞 컵밥 거리에서 한 고시생이 컵밥을 먹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매스컴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컵밥 취재 경쟁을 벌였다. 인근 업소들도 뒤질세라 컵밥 메뉴를 도입했지만, 이미 선발도 놓친 데다 임대료와 인건비를 포함한 직·간접비의 부담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전전긍긍 고민에 싸였다. 이즈음 대기업 계열의 편의점들까지 컵밥 전쟁에 끼어들었다. 눈치 빠른 프랜차이즈 본사들도 브랜드를 론칭한 덕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컵밥 공화국이 돼가고 있었다. 갈등은 심화되고 폭탄이 여러 차례 오간 뒤, 휴전은 이루어졌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은 그대로 안은 채 전장을 옮기는 것으로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역에서 나와 길을 건넌 뒤 왼쪽 도로를 따라가면 ‘컵밥 거리’가 나온다. 거창한 이름에 비해 규모는 아담하다. 그나마 인도 위에 자리 잡은 터라 덜 불안해 보인다.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은 도로와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컵밥 포차에 여학생이 셋, 남학생이 둘 서 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밥만 쳐다보다가 아주 가끔 고개를 돌려 밖을 응시한다.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단 한 명도 웃지 않았다. 어깨에 메고 있는 무거운 가방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컵밥, 착한 가격과 푸짐함, 그리고 초스피드

 

컵밥, 정확히는 스티로폼 밥이 맞다. 짜장면이나 짬뽕을 배달할 때 사용하는 그 새하얀 스티로폼 그릇에 밥을 담고 햄·소시지·볶은 김치에 계란프라이를 올려준다. 제육을 올리기도 하고, 마요네즈에 버무린 참치를 담아주는 집도 있다. 각 집마다 장기가 따로 있다. 경쟁이 심화되자 홍보 마케팅의 수단으로 음식물을 전시하고 있다. 용기에 재료를 담고 랩으로 감싼 뒤 매직으로 가격을 적어 넣었다. 여기 주인장들과 고객들 사이에는 암묵적 가격 상한선이 있다. 3500원. 일찌감치 철이 든 젊은 청춘들은 한 끼 500원 때문에 망설이기 일쑤다. 삼시 세끼 매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부담감이 이들을 애노인네로 만들고 있다. 긴축을 만드는 요인은 많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은 불확실한 미래에 있다. 학원 장벽 속에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스스로 비밀의 코드를 찾아내 풀지 않으면 탈출은 상상도 못한다.

 

컵밥을 찾는 이유가 꼭 돈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1분 1초라도 아끼기 위해 도로 위에서 서서 먹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만큼 쫓기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통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많은 고시촌 식당들 중에 국물을 푸짐하게 내는 집이 드물다. 자칫 포만감이 지나쳐 졸기라도 한다면 낭패기에, 가능하면 마른 식사를 찾기 때문이다. 졸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생체리듬 시계를 재조정하며 산 지 오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지만, 이 대목에서는 가슴이 많이 아프다. 그 덕에 반사이익을 보는 곳도 생겼다. 돈가스 전문점이다. 등심과 안심을 튀겨주는데 4500원. 등심과 안심에 연어까지 내주면 5000원. 고시촌 최고의 메뉴로 꼽는데 망설임이 없는 건 찰나를 즐기는 데이트 장소로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아끼니까 청춘이지만 이 정도의 과소비(?)는 애교가 아닐까? 수험생들은 잘 먹어야 한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인간의 뇌는 체중의 2%밖에 안 되지만, 에너지는 무려 20%를 소비한다. 그러니 잘 먹지 않으면 훌륭한 정보도 머리에 욱여넣을 수 없다.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는 건 아니다.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고시촌에서도 마일리지가 좀 있는 고참들은 별식으로 국수를 선호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편하게 후루룩 후루룩 한 대접 비울 수 있는 국수는 꽤나 인기 있는 메뉴다.

 

오피스 타운이라면 얼추 1만원은 줘야 먹을 수 있는 사골 칼국수가 3500원. 고시촌 하면 떠오르는 컵밥·도시락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제대로 뽑아낸 육수에 직접 제면한 면을 삶아서 말아준다. 국물이 뽀얗다. 숟가락으로 바닥을 긁으니 꺼룩한 육수가 꽤 묵직하다. 김치를 한 조각 올리고 젓가락으로 면을 휘감는다.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로 잔뜩 잡아 올린 뒤 서너 차례 입김을 세게 불고 냅다 입으로 밀어 넣는다. 뜨끈한 열기가 사라지자마자 새큼한 김치와 국수발이 파편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 순간만큼은 고시생이 아니다. 눈 깜짝할 새 면을 다 해치우고, 500원 하는 공깃밥을 청해 국물에 만다. 라면 국물에 말든 칼국수 국물에 말든 국물에 만 밥은 맛있다. 그 덕에 씀푸덩 목구멍으로 미끄러진다.

 

매일이 이러하면 좋으련만, 평화로운 일상이 와장창 깨지는 날이 있다. 동기나 지인의 합격 소식이 그렇다. 의당 축하할 일이지만 내 것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자제력을 무너뜨린다. 청천벽력이다. 기가 빠지고 맥이 풀린다. 신세가 한탄스러우면 입이 마르고 목이 타들어간다.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다스리는 데 알코올만 한 친구는 없다. 같은 처지의 동지들을 규합해 선술집으로 향한다. 고시촌의 술집은 왁자지껄함이 덜하다. 가격도 분위기를 많이 닮았다. 누구를 미워할 처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마냥 부러워할 상황도 아니다. 결박을 푸는 일은 본인밖에 할 수 없다. 오늘도 노량진, 신림동, 그리고 전국의 고시촌 어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건배사에는 탈출 기도문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 “자 한 잔 합시다. 사! 법! 고! 시!(사 년 후에 법원에서 보자. 고생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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