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사랑·꿈만 있다면 쌈마이 인생도 괜찮아!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18 09:34
  • 호수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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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 마이웨이》의 인기, 을(乙)이 공감할 수 있는 짠 내 나는 작품

 

최근 tvN 《코미디 빅리그》의 ‘오지라퍼’ 코너에선 이상준이 ‘박서준이서언이’로 나온다. 이상준은 이 코너에서 당대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남성 캐릭터를 가장하는데, ‘박서준이서언이’는 이번에 인기리에 종영한 KBS 월화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주인공 박서준을 가장한 캐릭터다. 《코미디 빅리그》에서 차용할 정도로 그는 요즘 인기 절정이다. 시청률 12~13%로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며 젊은 층 사이에서 폭발적이다. 경쟁작인 《엽기적인 그녀》 《파수꾼》 등이 한 자릿수 시청률이었기 때문이다. 《쌈, 마이웨이》는 주 시청층이 젊은 연령대로 제한되는 로맨틱코미디인데도 사극인 《엽기적인 그녀》를 제친 것이 놀랍다.

 

《엽기적인 그녀》는 2001년 한국영화 흥행 2위에 오를 만큼 큰 화제가 됐던 작품의 사극판 리메이크라고 해서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었다. 반면에 《쌈, 마이웨이》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 그야말로 ‘쌈마이’ 취급을 받았다. 일본 고전극인 가부키에서 남자 주인공을 ‘니마이메(二枚目)’, 막간에 흥을 돋우는 희극배우를 ‘산마이메(三枚目)’라고 했다. 그게 한국 연기판에 차용돼 정극 미남배우나 주연급을 ‘니마이’, 코믹 감초 캐릭터나 조연·단역·3류 배우 등을 통틀어 ‘쌈마이’라고 지칭했다. 니마이라는 말은 이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쌈마이는 3류 B급을 가리키는 말로 살아남았다. 《쌈, 마이웨이》는 극 중에서 박서준이 격투기에 도전하기 때문에 ‘싸움 마이웨이’라는 의미도 있고, 주요 인물들의 열악한 처지를 가리키는 ‘쌈마이 웨이’라는 의미도 있다. 극의 내용은 ‘쌈마이 웨이’에 더 가까운데, 작품도 《엽기적인 그녀》 등에 비해 열세인 ‘쌈마이’급 정도로 취급받았지만, 의외로 대박이 났다.

 

© 사진=KBS 제공

 

종전과 다른 ‘쌈마이’ 로맨스물 남자 주인공

 

되는 것 하나 없는 ‘찌질’한 청춘들 이야기다. 고동만(박서준)은 태권도 유망주였지만, 여동생 수술비 때문에 부정경기를 하다 영구 제명당했다. 그 후 해충 잡는 업체에서 보조 등으로 일하며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최애라(김지원)는 아나운서가 꿈이었지만, 현실에선 백화점 안내데스크 직원으로 고객의 막말에 시달린다. 백설희(송하윤)는 회사에서 무시당하는 비정규직으로 극한의 감정노동인 고객전화응대 업무 담당이다. 김주만(안재홍)이 유일하게 중견기업 정규직으로 안정된 월급을 받지만, 전셋집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도 못하는 처지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인 이들이 월세 30만원짜리 허름한 빌라촌에 모여 살며 서로를 지지하고 위로해 주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남자 주인공 고동만이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미래 비전도 없다. 그나마 열정을 불태우는 꿈이 격투기 선수가 되는 것인데, 그 꿈을 이룬다고 해도 딱히 얻을 것이 없다. 체육관 관장은 ‘격투기 하면 돈 벌 수 있느냐’는 고동만의 말에, 돈을 원하면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격투기는 부상이나 안 당하면 다행인 3D 업종으로 그려진다. 젊은 층이 선호하는 로맨스 멜로물에서 요즘 이런 주인공이 없었다.

 

로맨스물은 여성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로맨스 남자 주인공은 당대 여성들이 가장 선망하는 남성상으로 그려진다. 그게 최소 ‘실장님’이다. 《파리의 연인》의 박신양, 《시크릿 가든》의 현빈, 《꽃보다 남자》와 《상속자들》의 이민호 등이 모두 실장 내지 재벌 2·3세였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요즘엔 《해를 품은 달》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처럼 왕이나, 《별에서 온 그대》와 《도깨비》에서처럼 초능력자까지 등장했다. 《태양의 후예》에서 송중기는 일반 군인이지만 사실상 초인급으로 그려졌다. 요즘 로맨스물에서 남자 주인공의 특징들이 이랬다.

 

 

‘N포’ 세대·욜로族들이 공감한 쌈마이 드라마

 

그런데 《쌈, 마이웨이》에서 고동만은 쌈마이 인생 그 자체다. 현재도 비루하고 미래에서나마 상승을 이루겠다는 열정도 없다. 그저 좋아하는 격투기를 하며 살겠다는 정도의 대책 없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남자 주인공 캐릭터의 극적인 추락. 하지만 젊은 시청자는 뜨거운 호응을 보냈다. 고동만만 미래 희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시청자도 함께 포기했기 때문이다.

 

‘3포’ ‘5포’ ‘7포’를 넘어 ‘N포’라는 말이 나온다. 달관세대라는 말도 나왔다. 미래에 계층 상승을 이루어 물질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희망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요즘 20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의 처지가 열악해질수록 극적인 신분 상승의 판타지에 매달렸다. 로맨스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재산·신분·능력치 등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이유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일정 부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전히 판타지를 소비하는 시청자도 있지만, 그저 일상의 소소한 위로 정도로 만족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쌈, 마이웨이》의 깜짝 성공이 말해 준다. 신데렐라는 언감생심, 고동만 정도면 감지덕지라는 이야기다.

 

올해의 트렌드 키워드로 연초부터 회자된 말이 ‘욜로(YOLO)’다. 욜로족은 미래를 생각하며 허리띠를 졸라매기보다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나는 등 현재의 즐거움에 충실하려 한다. 미래 출세를 포기하니까 현재의 행복과 나의 꿈이 중요해졌다. 《쌈, 마이웨이》 등장인물들의 삶의 태도가 딱 그렇다. 미래의 세속적 성공을 위해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만이다. 4명 중에서 3명이 직장을 그만뒀다. 김주만 혼자만 열심히 회사에서의 성공을 목표로 뛰는데, 그가 유일하게 시청자를 짜증나게 하는 ‘발암’ 캐릭터로 그려졌다. 수준을 못 맞출까봐 여자친구와의 결혼을 미루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동만은 경제적 조건이 어떻든 당장의 사랑에 직진이다. 그런 친구들끼리 부대끼며 서로를 지지해 주면, 돈이니 출세니 안달복달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이 《쌈, 마이웨이》의 세계관이다. ‘친구와, 사랑, 꿈만 있다면 쌈마이 인생으로도 괜찮아!’인 것이다.

 

작품은 젊은이들의 삶을 디테일하고 현실적으로 그렸다. 압박면접을 빙자한 인격모욕에 눈물을 삼키는 모습, 정규직이나 상사의 갑질, 사회의 냉혹함을 마주하는 청춘의 무력감 등이 그것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쌈마이’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공감하게 했다. 얼마 전 《김과장》도 을의 처지를 디테일하게 그려서 깜짝 히트작이 됐다. 을이 공감할 수 있는 짠 내 나는 작품들이 뜨는 것이다. 쌈마이들이 《쌈, 마이웨이》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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