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급식, 그저 주는 대로 먹어라?
  • 김유진 푸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18 14:18
  • 호수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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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의 시사미식] 학교 급식 우습게 보니, 급식 노동자도 ‘미친×’라 업신여기는 것

 

한 야당 국회의원이 학교 급식 파업 노동자들에게 ‘미친×’라는 표현을 쓴 게 정치권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를 술렁이게 만들고 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궁금해진다. 학교 급식,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사전적 의미로 급식은 학생들에게 단체로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말한다. 급식의 역사를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리는 학자도 있다. 성균관에서 제공했던 식사가 그 논리를 뒷받침한다. 한복진·차진아 선생의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 식당의 급식운영 고찰 및 급식비용의 추정’을 참고하면 실제 조선시대 급식 내용을 세세히 검토해 볼 수 있다. 기록은 또 있다. 오늘날의 중등 교육기관에 해당하는 사학에 설치한 성균관의 부속학교 학생들에게 매일 급식을 제공했다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다.

 

서울 시내 한 중학교의 급식 배식 모습 © 사진=연합뉴스

 

議政府據禮曹呈啓, “四部學堂生徒, 常給一時之食, 使之終日講讀”

의정부에서 예조의 공문을 근거로 말하기를, “사부학당의 학생들에게 한 끼니 식사를 항상 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론하며 책을 읽게 하였다.”

 

박춘란 선생은 급식의 원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1398년 숭교장(서울 명륜동)에 학사를 준공하고 그 유생들에게 식사를 제공한 것이 시초라는 주장이다. 구한말을 지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급식은 진화를 거듭했다. 학교 급식시설의 철저한 교정, 특별 의료실의 설치를 위시한 교직원의 위생 강습소 설립 등 단순하게 밥을 나누어 주는 차원의 시설을 넘어 위생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황국신민양성이 교육의 목표였던 일제는 총독부 학무국이 주가 되어 급식제도를 촉진했다. 일제강점기가 권고 위주였다면, 해방 이후 분위기는 효과 측면으로 쏠린다. 1946년 동아일보에서 당시의 상황을 중계하고 있다. 

 

 

70년대 무료급식 중단되며 ‘유료화’의 길

 

‘식량난으로 말미암아 서울시내 각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동 중에는 결석하지 않으면… (중략) 서울시 당국에서는 시험적으로 일주일 전부터 청계·효제 등 13 국민학교 아동에게 점심을 급식한 결과 성적이 매우 좋아서 13 국민학교 교장회의를 열고 전면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곡물 위주의 급식이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혁명적 변화를 맞이했다. 유엔 산하 국제아동구호재단의 지원으로 분유와 콩, 우유가 신메뉴로 등장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은 수많은 결식아동을 양산했다. 1952년 말, 전국의 결식아동 수는 60만 명을 넘어섰고, 100일간 비상급식을 하라는 안건이 국무회의에 제출될 지경이었다. 1950년대 내내 구호식량인 탈지분유가 급식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가톨릭·기독교·불교 등 종교 차원의 결식아동 무료급식소가 설치된 것도 이 시기다.

 

이어서 우유와 분유를 대체한 것은 빵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원조 곡물로 만든 식빵이 급식 무대에 등장했다. 이후 지역에 따라 잉여 농산물을 활용한 국수나 수제비가 선을 보이는 곳도 있었다. 1966년 11월에는 부산·여수·인천·군산 등지에 입하된 옥수수가루와 밀가루 2만8408톤이 연탄 수송에 집중된 수송난으로 인해 운반되지 않아 전국 200만5000여 명의 결식아동들에게 급식이 중단되었다. 이에 문교부와 보사부, 그리고 철도청까지 나서 긴급대책 회의에 돌입했다. 아동들을 위한 급식 물자냐, 당장 공장을 가동시키고 난방을 해결해 줄 연탄이냐를 놓고 선택해야 할 만큼 지지리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1967년 아동 급식용 원조 양곡이 시장에 부정 유출된 사건이 매스컴에 보도되며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간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밀가루와 분유의 양을 줄이는 상습행위, 재료를 뒤바꿔 빵의 질을 조악하게 하는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강도와 다를 바 없는 위법 행위라고 지적하며 비양심적인 업자들의 소행을 고발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 물자 감축을 이유로 무료급식이 중단되면서 1970년부터는 빵과 우유가 유료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무상급식은 벽지의 학생과 기타 지역의 극빈층 학생만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이 와중에 국민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한 식중독 사건이 발생한다. 1977년 서울시내 약 8000명에 가까운 초등학생들이 크림빵을 먹고 식중독에 감염되었다.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심각했던 사건은 결국 ‘급식 전면 중지’라는 초유의 사태를 몰고 왔다.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식품 공해로 기록된 이 일은 공급 이틀 전에 제조된 크림빵이 발단이었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시설이 미비한 지하수로 만들었고, 위생처리도 철저히 이뤄지지 않았을뿐더러, 부패하기 쉬운 빵을 50시간이나 지연 공급한 엄청난 불상사가 일으킨 참사였다. 이로 인해 학교 급식용 제빵 회사들의 독점생산과 위생점검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급식도 교육의 일환’ 인식 가져야

 

1980년대 초반은 우유의 전성시대다. 재고가 늘면 싼 가격으로 학교에 공급하고, 시장에서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을 중단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되었다.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학교급식법 시행령’이 의결되기 전까지 무수히 반복된 일이다. 이후 정부와 학교, 그리고 학부모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급식비 지원, 초·중·고 일괄 급식 실시, 저소득층 지원, 식품오염 문제, 납품비리, 원산지 표기 의무 위반, 학부모 급식 동원 등등 당당할 수 없는 온갖 사건이 벌어졌고, 그 피해자는 언제나 아이들 몫이었다.

 

급식의 당사자인 ‘미래의 꿈나무’들은 관여할 여지가 없다. 결정한 대로 받아들이고, 주는 대로 먹어왔다. 이게 현실이다. 담당 행정부서에서 의사결정을 했고, ‘아랫것’들은 지시에 따라 충실히 실행한다.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닐까? 바꾸면 되고, 막 불러도 괜찮고, 미안하다 사과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급식도 교육의 일환이다. 문득 이번 사태를 접한 우리 아이들의 의견이 궁금해진다. 과연 누구를 ‘미친×’라 생각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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