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상징하는 일본식 ‘청와대 정문’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19 13:35
  • 호수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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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사에서 사용하는 양식…이명박·박근혜 정부 철거 요구 외면

 

지난 5월9일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기존의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사회 전 부문에 걸쳐 개혁의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고, 청와대 앞길도 24시간 전면 개방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약탈된 문정왕후 어보를 반환받는 성과도 이뤄냈다. 그러나 새 시대가 열리고 광복 72주년을 맞이했으나 청와대에 드리워진 일제 잔재는 여전하다.

 

시사저널은 제1167호(2012년 2월29일자)에 ‘청와대 정문 일본식으로 지어졌다’는 단독기사를 보도했다. 청와대 본관으로 통하는 정문과 영빈관 등이 ‘일본식’으로 세워졌다고 고발한 것인데, 5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지금의 청와대 본관과 영빈관 정문은 철제 문 사이에 네 개의 돌기둥을 일렬로 세우고, 그 위를 석등으로 장식했다. 우리나라 전통 양식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형태다. 문헌에도 없고 사례도 없다. 일본 신사(神社) 등에서 흔히 사용하는 양식이다.

 

야스쿠니(靖國) 신사는 태평양전쟁 전범이 안치된 곳으로 군국주의를 상징한다. 건축 양식은 ‘도리이(鳥居)’라고 불리는 정문을 세우고 그 옆에 석등을 배치하는 것이다. 일본 신사에서 석등은 ‘죽은 자를 위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청와대 정문도 일본 신사의 석등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찰 경내와 능묘에 석등이 설치된 곳이 있으나 정문에는 없다. 또 일본의 신사처럼 쌍등이나 다수의 등을 일렬로 배치하지 않는다. 단 1기만 상징적으로 세울 뿐이다.

 

청와대 정문이 일본식으로 세워졌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아직 달라진 게 없다. 위쪽 사진은 조선총독부 정문(왼쪽)과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석등(오른쪽) © 시사저널 이종현·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시사저널 보도로 처음 알려져

 

대한민국 최고 권력을 상징하고, 외국 국가원수가 방문하면 가장 먼저 들르는 이곳이 ‘죽은 자’를 상징하는 일본 신사의 건축양식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역대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불행한 전철을 밟은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섬뜩함마저 든다.

 

청와대 정문이 ‘일본식’이 된 내력은 이렇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서울 남산과 경복궁 두 곳에 총독부(구 통감부) 청사를 건립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35년 동안 한반도를 강제 점거하면서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수탈하던 총본산이다.

 

조선총독부의 정문은 지금의 청와대 정문과 거의 흡사했다. 철제 대문 사이로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석등을 장식하고 있는 것도 판박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2년이 흘렀지만 정작 ‘청와대 정문’은 아직까지 일제의 잔재를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청와대는 원래 조선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했다. 1927년에는 오운각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이곳에 총독 관저를 지었다. 청와대 본관은 이때 자리를 잡았다. 광복 후에는 미 군정장관이 관저로 사용했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 관저’로 바뀌었다. 이때는 ‘경무대’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지금의 청와대라는 명칭은 1960년 4·19혁명 이후에 탄생했다. 당시 정권을 잡은 민주당 윤보선 대통령이 경무대가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고 해서 ‘청와대’로 개칭했다. 본관이 화강암 석조에 청기와를 덮었다는 것을 참작해 명명했다. 일제 잔재가 서려 있는 본관에 대해 역대 대통령들은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청와대 본관을 신축하기로 하고 각계 인사 22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약 2년 뒤인 1991년 9월에 지금의 본관을 신축했다. 우리 고유의 전통 양식을 최대한 살려서 지었다. 우리나라 건축 양식 중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 청기와 15만 장이 들어갔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는 대대적인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진행됐다. 김 전 대통령은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고, 민족정기를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구 본관을 철거했다. 기왓장 한 장까지 철저하게 부숴 구 본관 지하에 파묻었다. 정작 본관을 다시 짓고 구관을 헐어냈지만 청와대 관문인 정문에는 일제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는 “과거 일제의 강압적 통치로 우리 민족이 수많은 고통을 당했다. 우리나라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청와대에 일본식 석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다. 즉각 일본식인 청와대 정문과 영빈관 문을 철거하고 전통식으로 다시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일본식 석등으로 지적받은 창덕궁 입구 석등, 환구단 석등, 경복궁역 5번 출구 석등 등은 모두 철거됐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청와대 정문 석등이다.

 

 

이명박 정부 거짓 변명으로 일관

 

시사저널이 관련 취재를 할 당시 청와대의 공식 입장은 “(정문) 건축과 관계된 사실관계를 유관기관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 뒤에 자세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정확한 답변을 유보했다. 보도 후 여러 언론에서도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청와대는 계속해서 거짓말과 궤변으로 일관하며 석등 철거를 회피했다.

 

같은 해 6월5일 기자는 청와대 대변인실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 ‘일본식 정문’에 대한 조치내용을 물어봤다. 청와대는 “기다려 달라”는 입장만을 고수했다. 대변인실 관계자는 “시설물은 경호처 소관이라 그쪽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했고, 경호처 관계자는 “다른 부처와 협의가 안 됐다”며 난감해했다. 기사가 보도된 후 4개월이 됐지만 청와대는 아무런 대처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질의서를 보낸 지 3일 만에 답변서가 이메일로 도착했다. 청와대 정문 건축 과정에서 일본식 석등 건축 양식을 모방하거나 고려한 바 없고,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과 전문가 등의 자문을 받아 면밀한 검토를 진행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다음에 정문 변경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청와대는 정말 ‘일본식 정문’에 대해 검토하고 있었던 것일까.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그해 8월1일 청와대에 ‘일본식 정문 처리’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8월10일 청와대는 대통령실 사회통합수석비서관 국민권익비서관 명의로 답변서를 보내왔다. 그런데 답변서가 어처구니없었다.

 

‘문주 양식’이라는 것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청와대 정문의 석등에 대해 일본 신사에 나타나는 석등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정문을 밝혀주는 기능을 강조한 문주등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또 여전히 관계기관 및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고,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는지 또 검토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청와대는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과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다고 했지만, 문화재청은 이미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석등’에 대해 일본식으로 유권해석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창덕궁 앞에 있는 일본식 석등과 관련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문화재청에 ‘일본식 석등을 철거하라’는 민원을 제기했고, 문화재청은 2011년 10월11일 민원에 대한 답변을 보냈다.

 

문화재청은 답변에 앞서 창덕궁의 일본식 석등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했다. 자문 결과, 일제 강점기 이전의 전통 양식에서는 석등 2기가 배치된 경우는 없었던 것을 확인했다. 반면, 일본 사찰에서는 쌍등 형식이 보이고 있으며, 신사에는 입구에 두 줄로 늘어선 석등이 다수 있다는 결론을 냈다. 이런 근거에 의해 철거를 결정했다.

 

문화재청이 ‘일본식 석등’으로 유권해석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청와대의 ‘의견수렴’은 거짓일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까지 청와대의 ‘일본식 정문’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와 연관돼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청와대 본관과 영빈관, 춘추관은 현대건설에서 시공했다. 당시 사장과 회장이 바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었다. 1977년 이 전 대통령이 사장에 취임한 후 그해 9월부터 현대건설은 영빈관의 설계와 시공을 맡았고, 이듬해 연말에 준공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도 현대건설에서 맡았는데, 이때는 이 전 대통령이 회장일 때다.

 

 

철거하고 새로 건립해야

 

박근혜 정부도 ‘일본식 정문’ 철거에 소극적이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청와대를 상대로 철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원고 패소했다. 그 뒤 청와대 측과 만났고 기존 석등을 전통적인 ‘보름달 모양의 석등’으로 교체하는 것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에게도 보고됐고, 박근혜 대통령의 재가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했다.

 

이제 공은 문재인 정부로 넘어갔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국민신문고를 통해 ‘일본식 청와대 정문을 철거하라’는 민원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7월6일 답변을 통해 “청와대 정문의 건축 양식에 대해 관계기관 및 전문가의 분석과 견해를 폭넓게 수렴하여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도록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보내왔다.

 

문재인 정부는 일본식 청와대 정문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청와대 정문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 수탈하던 조선총독부의 것을 이어받았다. 엄밀히 따지자면 민족의 한(恨)이 서려 있다. 굳이 ‘죽음’을 상징한다는 석등을 그대로 둘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혜문 대표는 “청와대는 국가의 얼굴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과감하게 일본식 정문을 허물어야 한다. 우리의 민족정기를 지키고 전통을 살리는 양식으로 대문을 교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와대의 일본식 조경 적폐 청산해야”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인터뷰

 

혜문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시사저널 박은숙

박근혜 정부 때 ‘전통적인 보름달 모양의 석등’으로 바꾼다는 말이 있었다. 그때 청와대 측과 절충점을 찾았다고 들었다.

 

청와대 측도 문제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따라서 청와대 대문을 현 춘추관과 같은 전통양식으로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그러나 예산상의 문제로 우선 석등을 제거하고 보름달 모양의 문주등으로 교체한 뒤, 점진적으로 전통양식의 대문으로 교체를 추진하려고 했다.

 

 

‘철거’냐 아니면 ‘교체’냐를 두고 말이 많다.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청와대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구성으로 건축된 구조물이다. 따라서 원론적으로는 일본식 석등을 완전 철거하고 전통의 솟을대문으로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미 청와대는 대문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춘추관 대문을 전통식으로 조성한 선례가 있다. 여기에 입각해 개선의 방향이 잡힐 것으로 예상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철거하라’는 민원을 제기해 답변이 왔다고 들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국민권익위를 통해 ‘청와대 대문 개선에 관한 진정’을 제출했다. 청와대는 일단 문제제기를 받아들이고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존의 방침보다 일단 진일보한 입장으로 생각한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향후 단체에서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가.

 

우선 청와대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몇 개월간 지켜볼 예정이다. 올해 말까지 움직임이 없다면 청와대 일본식 조경 개선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이미 대통령 스스로도 청와대로부터 나와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한 만큼, 조선총독부 관저로 출발한 청와대의 불운한 역사를 잘 이해하고 계실 듯하다. 이번 기회가 청와대에 남아 있는 일본식 조경의 적폐가 청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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