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철수’했지만 ‘철수’한 게 아닌 얘기
  • 김회권 기자 (khg@sisajournal.com)
  • 승인 2017.07.1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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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의 기적을 이루는 과정 영화로 그려낸 크리스토퍼 놀란

 

하나의 영화를 두고 치열한 예매 전쟁이 펼쳐졌다. 새단장한 CGV용산아이파크몰에 IMAX 레이저 상영관이 들어섰다. 가로 31m, 세로 22.4m라는, 전 세계 멀티플렉스 중 최대 크기의 스크린이 이곳에 걸렸다. 일반 상영관 스크린보다 5배 이상 크다. 특히 레이저 영사기를 갖췄기 때문에 기존 아이맥스와 비교해도 밝기와 선명함이 향상됐다.

 

이 거대한 스크린에 걸릴 첫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첫 실사영화 ‘덩케르크’다. 이름만으로 기대받는 영화 감독인 놀란의 ‘덩케르크’는 촬영 대부분 아이맥스 카메라를 사용했다. 따라서 관객들이 온전히 즐기려면 아이맥스 극장을 찾는 게 좋다. 놀란 감독도 직접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덩케르크’를 봐야 훨씬 생동감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왜 아이맥스에 예매가 몰리는 지 그 의문은 해결됐다.

 

© 워너브라더스 제공

 

절체절명에 몰린 사람들의 용감한 철수

 

그럼 놀란은 왜 자신의 첫 실사 영화로 덩케르크를 주목했을까. 2차 세계 대전 초반인 1940년 5월, 프랑스의 항구 도시 덩케르크에는 수세에 몰린 영국·프랑스 연합군 40만명의 구출 작전이 시도됐다. 영국에서 ‘덩케르크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상 최대의 철수 작전이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전쟁을 바꿨고 세계를 바꿨다.

 

당시 독일군은 대포와 전차 등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기갑 부대의 힘이 막강했고 엄청난 속도로 전선을 밀어붙였다. 순식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40만명의 병사는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 덩케르크로 몰렸다. 포위하는 독일군의 수는 그 두 배인 80만명이었다. 처칠 영국 총리는 수세에 몰린 40만명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결사항전’ 대신 정반대의 ‘철수’였다. 전원을 구출하기로 한 싸움이었다. 

 

철수를 돕기 위해 도버 해협에 떠있는 군함뿐만 아니라 민간 선박에 바지선까지, 약 900척의 배가 긴급 징용됐다. 구출을 돕기 위해 스스로 나선 자원봉사형 선박도 있었다. 이런 민관일체의 철수 작전이 ‘덩케르크 전투’다. 

 

덩케르크의 기적은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치며 성공했다. 당시 독일의 최대 전선은 동쪽, 즉 소련과의 전쟁이었다. 거기에 전력을 투입하고 싶은 독일 측의 고려는 추격의 속도를 떨어트리는 빈틈이 됐다. 여기에 더해 덩케르크에 자주 생기는 안개도 도움이 됐다. 이런 우연은 최선의 노력과 겹쳤고 포위된 40만명의 연합군 중 약 33만명의 병사가 구출됐다.

 

놀란이 주목한 부분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몰린 사람들의 ‘용감한 철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우리도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덩케르크 전투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덩케르크의 철수로 33만명의 병사들이 생명을 구했기에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가능했다. 덩케르크에서 보존한 병력이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퇴각이었기에 덩케르크 전투는 2차 세계대전의 큰 전환점으로 평가받았다. 싸움이 아닌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전투였다. 

 

그 배경에는 민주주의도 한몫했다. 전쟁 속에서도 국회를 열고 선거를 치렀던 영국이다. 전투와 철수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정부에서 벌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토론을 한다는 영국 민주주의의 강점은 2차 대전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런 논쟁을 통해 결정된 철수 명령은 민주주의라 가능했던 얘기였다. 만약 권위적인 철권통치였다면, 불명예스럽게 여겨질 ‘철수’보다는 결사항전을 요구했을 수도 있다. 

 


 

영국은 ‘기적’, 프랑스는 ‘부정적 유산’

 

영화는 이런 집단의 자율성을 현장에서 풀어내고 있다. 놀란은 덩케르크라는 위기의 공간 안에 존재하는 개인들의 경험을 인간적인 이야기로 보여줬다. 그리고 영화 속 캐릭터들의 교차하는 시선으로 공통의 사건을 관객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관객은 자연스레 시민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덩케르크의 기적’이 이뤄지는 과정을 목도하는 목격자가 된다. 

 

다만 역사적으로 볼 때 덩케르크의 위기를 바라보는 영국과 프랑스의 시선은 좀 다르다. 덩케르크는 프랑스 땅이다. 당시의 위기에서 프랑스군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법은 영국군과 함께 국토를 떠나 바다를 건너는 것이었다. 1964년 나온 프랑스 영화 ‘쥐트코트(덩케르크에 위치한 해변의 지명)의 주말’을 보면 기념품을 챙기고 철수하는 영국군의 여유로운 모습이 등장했다. 영국군을 먼저 철수시키려는 영국 정부의 결정을 비난하는 장면도 나왔다. 실제로 사망자와 투항자 중 다수는 프랑스군이었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 입장에서 덩케르크는 부정적인 유산이다.

 

반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영국군이 살아 돌아온 덩케르크의 철수는 기적이자 영광이었다. 영국 출신인 놀란은 덩케르크의 미담을 듣고 자란 세대다. 그의 영화가 영국의 시선을 담아낸 건 참고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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