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뀌며 조선학교 관심도 달라졌죠”
  • 이인자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24 14:31
  • 호수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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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조선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꾸준한 관심과 성원이 신뢰관계 구축으로

[편집자 주]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이인자 교수는 재일교포·묘제(墓制) 연구의 권위자이며 동일본대지진 연구에서 세계 일인자로 평가받는 석학(碩學)이다. 이 교수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후 피해지역을 답사하며 재난에서 살아남은 희생자 유족과 생존자들의 정서적 피해와 복구에 대해 연구해 왔다. 

 

장마철인데 비는 내리지 않고 연일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7월초에 가나가와(神奈川)조선중고급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그날만 잠깐 비가 왔지만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조선학교 수업참관과 교장 선생님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같이 가자는 지인의 연락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갔던 답사였지요. 정확한 위치를 잘 몰라 더운 날에 길을 잘못 들어 결국엔 학교 측에 전화로 길을 물어 겨우 도착했습니다.

 

“더운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상했던 모습보다 훨씬 젊고 훤칠하신 교장 선생님이 더위로 상기된 저희들을 맞이해 주셨습니다. 역에서 학교를 찾아가며 살펴보니 그 어느 곳보다 오래된 듯한 건물이 조선학교였습니다. 1층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응접실에 들어서자 함께 온 지인은 교장 선생님에게 10여 년 전 만난 분이신지 확인을 하고 싶다며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 아버님께서 8형제이신데 7형제가 모두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가셨다는 그 선생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제 아버지가 8형제인데 모두 북으로 가서 아버지만 남았지요.”

“그럼 제가 알고 있는 그 선생님이시네!”

 

이렇게 첫 인사를 나누자 서먹하고 딱딱할 수도 있었던 자리가 많이 부드러워지고 자연스럽게 북한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도 북에 간 친척들과 연락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고모와 큰아버지처럼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같은 또래 사촌들과 소통한다”고 하더군요.

 

조선학교의 수업 장면. 야참을 만드는 선생님(오른쪽 위)과 맛있게 먹고 있는 학생들 © 사진= 이인자 제공

 

다양한 입장의 재일동포 존재

 

‘생활들은 어떠냐’고 묻자 이렇게 답하시더군요.

 

“80년대엔 우리 부모님이 많이 방조(도움)를 했지요. 친척들 한 사람당 1만 엔씩 주고 오느라 힘들었지요. 당시로는 1만 엔이 있으면 1년은 편히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한 달도 어렵다고 합니다. 90년대엔 10여 년간 힘든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자기 생활을 자기가 해야 한다는 걸로 바뀌어 외국(중동)에 나가 돈을 벌어 오는 친척도 있습니다. 중동에 2년 정도 다녀온 친척은 집도 새로 짓고 생활에 여유가 있지요.”

격세지감을 느꼈습니다. 재일동포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995년에서 1997년 즈음에는 북한의 실정에 대해 알고 싶어도 북한에 다녀온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사람들은 한결같이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재일동포 중에는 북송선을 타고 간 친척들이 도시에서 변방으로 추방되거나 연락이 끊긴 점을 들어 그들을 구출하고자 일본 인권단체와 연계해 북한을 비판하는 집회도 큰 도시에서 열곤 했습니다.

 

제가 조사하던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 중에도 고등학생 때 단신으로 북송선을 타고 간 딸을 만나고 돌아온 아버지가 일주일 넘게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잠시 실어증에 걸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차마 그 이야기를 그분에게 묻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조사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돼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때 심정을 이야기해 줬습니다. 딸이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고 일본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이 고통스럽지만 가족에게도 표현하지 못해 병이 났던 거라고.

 

교장 선생님은 한국 사람들과의 사귐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와줘서 교류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지요. 교류를 하러 오는 사람도 없어지고 조선적(朝鮮籍)인 사람이 한국에 가려 해도 허가를 안 해 주고 국적을 바꾸도록 회유하는 일이 빈번해 신뢰 관계를 쌓기가 어렵지요.”

재일동포를 20여 년간 연구하는 저로서도 그의 말에 공감을 합니다. 2000년 전후로 조총련에 관해, 특히 조선학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감이 있었습니다. 민족교육을 지켜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재정적 어려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불과 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관심보다 경계의 대상이었는데 말입니다. 일본 안에는 재일동포라 해도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여러 이유로 조선적을 유지하는 조총련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있습니다. 미혼인 자녀를 둔 가족이 같은 단체와 국적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2004년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한 후로 조총련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국적이나 일본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까르르 웃으며 반긴 조선학교 학생들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는 조총련에 남고 어머니와 아이들은 한국 국적으로 변경하는 집도 있었습니다. 북에 가족이 있거나 일본 내에서 너무 핍박을 받고 있는 조총련 동지들을 등질 수 없어 의리로 남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민단과 조총련을 대립구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요. 오히려 한국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립구도에 각을 세우지는 않는지 우려해 봅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세가 달라지는 것을 두고 교장 선생님께서 신뢰관계를 쌓기에 가늠할 길이 없다는 점을 이야기했다고 봅니다.

 

수업참관도 했습니다. 교실 안은 학생들이 15명에서 20명 정도 있고 뒤 게시판을 보면 일본 사회 그리고 북한(조국)과 한국(남조선)에 관한 시사를 전하는 전시도 있었습니다. 중학교 어느 교실에는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환영하는 코멘트와 함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모든 교실에는 행사 달력이 그려져 있었는데 학생과 선생님의 생일도 기입돼 있어 서로 간의 친근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견학자 방문이 교사나 학생들에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터인데 한결같이 밝게 맞이해 줬습니다.

 

1층 중앙에 있는 복도 즈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서 따라가 보니 학생들이 작은 덮밥용 용기에 든 우동을 먹고 있었습니다. 조리실에서는 조금 전까지  수업을 하던 여선생님들이 우동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곧 기말고사 기간이라 학교에 남는 학생이 많은데 저녁 요기로 우동을 만들어 먹인다는 것입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즐겁게 식사를 하면서 독특한 억양의 우리말로 마냥 떠듭니다. 저를 발견하고는 “정말 맛있습니다. 이거 드시겠습니까?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다섯 그릇은 먹을 수 있어요”라며 또 까르르 웃으며 반깁니다. 굴러가는 나뭇잎만 봐도 웃는다는 나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명랑함에 저마저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모습과 달리 어려운 현실도 있습니다. 우경화 성향이 강해지는 일본 사회에서 차별의 타깃이 되고 있고, 지붕이 새고 계단 일부가 헌 상태의 건물, 교사들의 월급 연체 등이 상징하는 재정난도 심각합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기에 조선학교에 대해 이전보다 관심과 성원을 보일 거라 예상합니다. 그 관심과 성원이 정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재외동포와의 신뢰관계 구축을 위한 것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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