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개성보다 흥행 공식이 먼저 보이는 《군함도》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7.28 16:18
  • 호수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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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 향한 무난하고 예상 가능한 질주

 

《택시운전사》와 더불어 올여름 한국영화 최대 기대작 중 한 편인 《군함도》가 베일을 벗었다.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남서쪽으로 18km 떨어진, 모양이 군함을 닮아 군함도라 불렸던 하시마(端島) 섬. 갱저가 해저 1km에 달하는 이곳의 거대 탄광은 1940년대 일본 군수물자의 거점이었다. 영화는 이곳에 강제징용 된 이후 목숨을 걸고 탈출을 계획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군함도》의 순 제작비는 220억원. 70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 대작이다.

 

출발점부터 이미 너무 많은 짐을 진 탓일까. 이 영화는 여름 대작으로서 ‘천만 영화’를 향한 의지와 군함도라는 공간을 향한 감독의 작가적 욕망, 역사의식과 블록버스터의 공식 사이에서 조금씩 주춤하는 모양새다. 그만큼 장점도, 아쉬운 점도 분명하다.

 

영화 《군함도》에서 악단장 강옥 역을 맡은 황정민과 그와 같이 공연을 올리는 어린 딸 소희 역을 맡은 김수안.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역사의식과 흥행 공식 사이에서 주춤

 

《군함도》가 시작하자마자 뜨는 자막은 실제 역사적 사실로부터 영감을 받은 창작물임을 분명히 밝힌다. 군함도의 조선인 강제징용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품은 인물과 그들 사이의 사건은 극화한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우연히 군함도의 항공사진을 본 뒤 그 안에서 벌어질 법한 이야기들이 자신을 자극했다고 밝혔다. 역사적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는 책임감은 오히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것이다.

 

여기에 감독이 조금 큰 상상력을 보태 입힌 것은 탈주극의 레이어다. 군함도에 강제징용 됐던 조선인들 중 일부 개인이 탈출한 사례는 있지만, 단체로 탈출한 기록은 없다. 류 감독은 “정리되지 않는 과거사에서 탈출한다는 의미”로 탈주극 서사를 만들었다고 했다. 진작 청산됐어야 할 과거가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유령처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극에 투영한 것은 자신의 그런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며, 크게 보면 ‘헬조선 탈출기’라는 것이 감독의 설명이다.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악단장 강옥(황정민)과 그와 같이 공연을 올리는 어린 딸 소희(김수안), 주먹으로 종로를 주름잡던 건달 칠성(소지섭), 일본인 위안부로 여러 곳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말년(이정현), 군함도에 징용된 독립운동가를 구출하기 위해 잠입한 광복군 소속 OSS 요원 무영(송중기) 등이다. 물론 이들의 곁에는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않는 수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있다. 이들 모두가 징용인 줄도 모르고 일본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온 사람들이다.

 

《군함도》가 묘사하는 그곳은 지옥이다. 끝도 없는 갱도, 좁은 통로로 기어 들어가야만 석탄을 채취할 수 있는 개미굴로 밀어넣어진 소년들, 여자와 소녀들을 감옥처럼 가둬놓은 위안소, 짐승 취급에 가까운 착취와 폭력의 묘사들은 눈을 질끈 감게 할 정도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은 전쟁 막바지, 일본 전역에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한다. 전쟁에서 패할 것을 대비해 전범 이력을 지우려는 이들은 군함도의 조선인을 몰살할 계획을 세운다.

 

전반부가 인물과 배경의 충실한 소개였다면, 후반부는 본격적인 탈출과 전투의 서사로 채워진다. 인물들의 모든 울분이 터져 나오는 이 대목은 뜨거운 감정의 드라마다. 다른 이를 위한 희생과 애끓는 부성애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무영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탈출을 도모하는 장면은 명백히 촛불혁명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 장면 자체로도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국민들이 손에 든 촛불의 힘으로 우리 사회가 정권교체를 이뤄낸 이후임을 상기하면 더 큰 울림이자 익숙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영화 《군함도》의 광복군 소속 OSS 요원 무영 역을 맡은 송중기(왼쪽)와 건달 칠성 역을 맡은 소지섭.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영화 대작들이 흥행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

 

존재는 익히 알았으나 그 실상을 제대로 몰랐던 군함도의 역사적 상흔을 용기 있게 고발하고 나선 것은 이 영화의 분명한 성취다. 그러나 이를 지탱하는 영화의 설정들은 어딘가 조금씩 기능적으로 느껴진다. 딸의 손을 잡은 아버지, 의리 있고 싸움에 능한 건달, 위안부 피해자, 이 모두를 구할 계획을 세우는 특수요원이라는 인물 구성을 듣자마자 이들이 극 안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 대강 그려진다. 그리고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이는 《군함도》만의 문제라기보다 대작 영화를 표방한 최근 한국영화들의 총체적 문제다. 배우의 기존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안전한 타입 캐스팅, 자본력을 등에 업은 방대한 스케일, 대사 등을 통한 메시지의 직접적 전달은 소재와 캐스팅이 각기 다른 모든 영화의 화법을 엇비슷하게 만든다. 연출가의 개성보다 흥행의 공식이 먼저 보이는 것이다. 무난하다는 것이 곧 강점이 될 순 없다.

 

《군함도》의 곳곳에서는 종횡(縱橫)의 이미지가 두드러진다. 좁고 기다란 갱도, 다닥다닥 붙은 유곽 등의 동선을 고려하면 나올 수밖에 없는 화면이다. 이 공간 배치와 스토리가 맞물리면 더 실험적인 연출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함도》의 영화적 실험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무게감 앞에서 조금 주춤하는 인상이 강하다. 제작진은 역사의 비극을 자칫 스펙터클로 치환할 수 있다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애초의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군함도》는 꼭 대작이어야만 했나.

 

이는 공교롭게도 《군함도》보다 한 주 앞서 개봉한 《덩케르크》의 사례를 떠오르게 한다. 《다크나이트》 3부작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소재로 만든 대작이다. 놀란은 이 역사적 사실을 다양한 인간 군상의 드라마가 아닌 ‘생존을 향한 시간’으로 압축해 접근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결국 시간 묘사다. 서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교차 편집한 세 개의 서사로 땅과 하늘, 바다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묘사한 이 영화의 방향은 결국 생존, 그리고 인간다움을 향한 하나의 점으로 수렴한다. 여기에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독일군의 시각, 어린 군인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에 대한 묘사, 관객의 긴장을 풀어준다는 명목하에 강행되는 유머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장의 한복판에 선 이들의 숨결까지 낚아채는 듯한 카메라와 IMAX를 향한 감독의 고집은 관객이 누려야 할 영화적 체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시계 초침과 부비트랩의 사운드를 연상시키며 신경을 곧추서게 하다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체험으로 기능하는 음악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적 체험으로 만드는 데는 보다 근본적이고도 기술적인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 최근의 한국영화 대작들이 기록적인 흥행을 위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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