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랭기 기후변화가 낳은 중세 스페인 예술
  •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8.0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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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지구 위 인류사(유럽사 편)]

 

유럽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끼겠지만, 스페인의 문화유산은 참 독특하다. 바로 이웃하고 있는 프랑스를 비롯해서 해안가를 따라 이탈리아, 로마, 더 위쪽의 영국, 스위스, 독일들이 모두 비슷한 유럽적 요소를 보이는 가운데 유독 스페인만 튄다. 뭔가 동양적이고 아랍적인 요소가 유럽적인 요소에 통합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알히베스 연못. © 사진=Pixabay

 

눈길이 가는 곳마다 그런 요소들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를 하나만 꼽으라면 스페인 그라나다 지방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음악가 프란치스코 타레가의 명곡 '알함브라 궁전의 회상' 덕분에 오디오로 더 익숙한 이름이지만, 건축과 실내장식 등 비주얼 아트에서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명소다. 위 사진은 그 중 궁전의 저수지였던 알히베스 연못을 보여준다. 인도의 타지마할을 연상시킬 정도로 아시아적인 느낌이 강하다.

 

왜 지중해 연안의 많은 지역 중에서 아시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베리아 반도에 이렇게 아시아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세계사 속 궁금증은 기후변화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많이 풀린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봤다. 이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문화유산의 아시아적 요소는 기후변화 및 그에 따른 생태계 변화에 따라 한랭기동안에는 지중해의 패권이 주로 소아시아 및 서아시아 계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페니키아, 카르타고, 아랍의 최전성기 때 판도. 모두 유럽에 비해 동남쪽에 위치한 아시아계 사람들이 세운 나라들로 한랭기에 번영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 사진= 이진아 제공

 

위 지도들에서 알 수 있듯이, 홀로세 기후 최적 이후 지구는 거의 규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랭기와 온난기를 반복하는 주기적 기후변화를 보여 왔다. 그리고 거의 예외 없이, 해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한랭기 동안에는 동쪽 해역의 아시아계 종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온난기 동안에는 서쪽 해역의 유럽계 종족이 주도권을 차지했다. 

 

 

로마제국 몰락 후 500년, 아랍인의 해양 진출 활성화

 

기독교 문화권 유럽인의 입장에서 ‘중세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기, 즉 서기 500년대 로마제국 몰락 이후 약 500년 간 지속된 한랭기는 지중해 동쪽 끝의 아랍인들에게는 모처럼 해양족으로 융성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였다. 페르시아 제국 멸망 이후 분열을 계속하다가 마호메트의 리더십 아래 칼리프 체제로 뭉치기 시작한 당시 아랍에서는 기본적으로 육지를 기반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한랭기를 맞아, 또 지속불가능했던 자체의 운동력에 따라, 로마인의 세가 급격히 약해지자, 아프리카 북부 해안의 국가들은 로마인들을 몰아내려 하기 시작했다. 아랍인들은 이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강제로 점령하기도 하면서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내륙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영토를 넓혀갔다. 이집트를 손에 넣은 후부터는 카이로라는 천혜의 항구를 발판으로 바다로 진출, 더욱 서쪽으로 확산이 쉬워졌다. 

 

서쪽 끝, 지금의 모로코까지 가서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를 손에 넣기가 식은 죽 먹기였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상황은 이들의 진출에 더욱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을 것이다. 로마제국 시기 민족대이동 과정을 통해 동북쪽으로부터 와서 자리를 잡았던 서고트 족이 거의 이베리아 전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원주민과 통합이 썩 잘되지 않았다. 따라서 아랍인이 지배계급인 서고트 족을 몰아내기만 하면 큰 어려움 없이 이베리아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한랭기에 새로 주역이 된 아랍인들은 원래 아랍 내륙에서부터 오랜 종족 간 헤게모니 쟁탈전을 통해 잔뼈가 굵어 온 이들이다. 육지 사람들이었던 그들은 지중해 동쪽 해안가에서 성장했던 페니키아, 그리고 그 후손들이 세운 나라인 카르타고의 사람들과는 달리, 처음에는 지중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서기 640년 이집트에서 첫 이슬람계 통치자가 된 아므르 이븐 알라스가 본토인 메카로 돌아가 최고 칼리프를 알현했을 때, 지중해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칼리프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마치 벌레가 통나무 위를 기어다니듯, 분별없는 자들이 돌아다니는 웅덩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지중해의 가치에 눈을 뜨게 됐고, 그 가치를 잘 이용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배를 만들 크고 단단한 나무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아랍인들이 눈독 들인 땅은 두 군데다. 우선 육로로 갈 수 있는 아프리카 북부, 특히 아틀라스 산기슭을 따라 삼림이 형성된 곳이다. 지금의 알제리와 모로코의 해안지방에 해당된다. 

 

다음으론 이베리아 반도였다. 여기선 당시 화폐와 귀금속의 주재료였던 은 매장량이 많아 카르타고 시절부터 대규모로 채굴됐었다. 이어 이 지역을 점령한 로마제국 역시 무분별한 채굴을 계속하다가, 로마제국 중반을 넘기면서 거의 채굴할 만한 은이 다 소진되어가자 그냥 내팽개쳐지다시피 했다. 

 

로마인의 발길이 뜸해진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삼림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원래 삼림 생육에 유리한 생태적 조건을 갖춘 곳이다. 대서양과 지중해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을 서쪽과 남쪽에서 받는 위치에 있으며, 반도 동쪽에는 높은 이베리아 연산지대가 있어서 그 서쪽으로 풍성한 삼림과 비옥한 땅이 조성되기 알맞다. 온난기 후반 동안 빠르게 회복됐을 뿐 아니라 한랭기에 들어서도 무성한 삼림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대로 영토를 확장한 우마이야 왕조를 비롯한 아랍인들은 북아프리카보다도 이베리아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배를 만드는 데 적합한 크고 단단한 목재는 아프리카 북서부 해안지역, 아틀라스 산기슭에서도 나왔지만, 이곳에서 목재를 공급하는 베르베르인은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원주민들도 아주 고분고분하진 않았어도 훨씬 수월했으며, 또 이곳의 나무 목질이 배를 만들기에 더 적합했다. 그렇게 해서 이베리아 연산지대 중 저지대의 나무들은 빠른 속도로 잘려나갔다.

 

 

이베리아 반도를 뒤덮은 벌목 작업

 

이 대대적인 벌목 작업은 중세 암흑기 한랭기가 최저점을 친 직후인 8세기 중후반부터 11세기 초까지 약 250년간 지속된다. 그 사이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쉽게 목재를 채취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소진됐다. 목재가 구하기 어려워진데다가 해류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해서 본토에서 오는 지원이 현저히 약해지면서 아랍인들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좀 더 북쪽 피레네 산맥 쪽으로 물러났던 기독교계 유럽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침공해왔다. 

 

13세기 초가 되자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은 그라나다 토후국(Granada Emirate) 정도만 남게 됐다. 바에틱 산맥이 만들어주는 자연적 방어벽과 함께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과의 접근성 덕분이었지만, 그나마 1492년엔 기독교 세계로 귀속된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에 12세기 중반부터 약 120년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이베리아 반도 끝으로 몰린 아랍 세력들이 자신의 문화를 지속시키고 싶은 열망 속에서 총력을 기울인 회심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지형도와 그라나다 소재 알함브라 궁전 밤의 전경. © 사진=이진아, pixabay 제공

 

이베리아에 있어서 이슬람의 통치력은 온난기에 접어들면서 빠르게 기울어갔다. 하지만 서기 400년대부터 적어도 600년은 계속된 이슬람 문화의 영향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언어, 기술, 문화, 사회제도 등등 삶의 전반에 있어서 이베리아 반도의 사회가 기독교적 질서 속에 이슬람적 요소를 강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세암흑기 한랭기로부터 10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 온난기에 들어있는 지금 우리의 눈에 이 시대의 문화 흔적들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기후변화에 따른 생태계 변화, 그에 따른 인간 대응전략의 변화를 거쳐 오면서 세상이 그만큼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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