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끝나지 않은 싸움
  • 조해수·조유빈 기자 (chs900@sisajournal.com)
  • 승인 2017.08.14 14:25
  • 호수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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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배상 없다”는 일본 정부, “개인 소송”이라는 한국 정부…4년째 침묵하는 대법원

 

광복 72주년을 앞두고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을 당한 조선인 피해자들에게 일본 전범 기업이 위자료 배상을 해야 한다는 국내 법원 판결이 또 나왔다. 광주지법은 8월11일 김재림씨(87) 등 4명이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졸업 직후인 1944년부터 미쓰비시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돼 강제 노역을 해 온 피해자들은 엄격한 감시 체제 아래 일하면서 급여도 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강제징용의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미쓰비시가 원고들에게 각 1억원에서 1억50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판결이 나와도 소송은 끝난 것이 아니다. 전범 기업들이 한국 법원의 손해배상 판결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로 맞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을 상대로 국내에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15건에 이르지만, 마무리된 소송은 단 한 건도 없다. 2000년 5월 국내 법원에 처음으로 제기된 소송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다.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을 당한 조선인 피해자들의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사진=연합뉴스


 

긴 세월 동안 고령의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사망했을 뿐, 배상과 사과는 일절 없었다. 여전히 일본 정부는 “개별 배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한국 정부마저 “개인적인 소송”이라 치부하며 국가적 입장 표명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17년 넘는 소송 기간, 피해자들 세상 떠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38년 일본이 공표한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동원됐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일본 본토 내 자원만으로는 전비를 충당하고 전력을 강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한반도의 인력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강제징용은 노무 동원과 병력 동원, 군 위안부 세 가지 형태였다. 병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전쟁 현장에, 노무에 동원된 사람들은 광산이나 항만·군수공장 등 산업현장에 배치됐다.

 

일본 정부가 공개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강제징용된 사람들은 782만7355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인 전체 인구는 2630만여 명으로, 약 30%가 강제징용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마저도 위안부 피해자들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고, 일본 정부가 통계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동원 인원을 축소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전쟁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인력이 더욱 부족해지자 일본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조직했다. 일본은 1944년 8월 ‘여자정신 근로령’을 공포하고, 초등학교 6학년이나 졸업생을 대상으로 모집을 빙자한 강제동원에 나섰다.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며 학생들을 속이기도 했다.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제비뽑기로 동원된 학생들도 있었다. 60명의 학생 중 제비뽑기로 50명이 뽑혔을 때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 항공기 제작소나 방적회사·탄광 등에 동원돼 중노동을 해야 했지만, 임금은 전혀 지급되지 않았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서는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군 위안부 취급을 당해야 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은 1997년이었다. 고 여운택씨(당시 74세) 등 강제징용된 피해자 2명이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철주금(옛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금과 강제노동 기간 받지 못한 임금을 지급하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2001년 오사카지방재판소는 원고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고, 2002년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했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원고 최종 패소를 선고했다.

 

여씨 등은 2005년 2월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다. 1심인 서울중앙지법과 2심인 서울고법은 일본 법원의 확정판결을 근거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제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히면서 배상청구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신일철주금이 1인당 1억원의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판결했다. 신일철주금은 승복할 수 없다며 재상고했고, 여씨는 같은 해 12월 확정판결을 보지 못한 채 별세했다.

 

한국에서 제기된 첫 소송은 2000년 고 박창환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1억원의 위자료 청구 소송이었다.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청구 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기각했으나, 대법원은 2016년 5월 원심을 깨고 부산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부산고법은 2013년 7월 “피해자 유족에게 각각 80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해 또다시 상고했고, 소송은 대법원에 4년째 계류돼 있다. 17년이 넘는 긴 재판 도중 피해자 4명이 사망했다.

 

대일항쟁기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을 상대로 국내에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15건에 이르지만, 마무리된 소송은 단 한 건도 없다. © 사진=연합뉴스


 

이외에도 미쓰비시를 상대로 6건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 군수공장에 끌려가 일하다 1945년 8월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피폭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던 강제징용 피해자 14명은 2013년 미쓰비시를 상대로 1인당 1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 소송에서 “피해자 14명에게 각각 9000만원씩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미쓰비시는 자유를 억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했으며 원자폭탄 투하 이후에도 적절한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며 “이런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은 “한일청구협정권에 따라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주장하며 항소했고, 이로 인해 소송은 서울고등법원에 계류돼있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 재판 고의로 지연시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1~3차까지 모두 3건의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12년 양금덕씨(당시 83세) 등 원고 5명은 피해자 1인당 1억100만원씩의 위자료를 미쓰비시에 청구하는 소송을 광주지법에 제기했다. 피해자들이 고령인 점을 고려해 미지급 임금은 청구하지 않았다. 미지급 임금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소송이 길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광주지법은 2013년 11월 피해자 4명에게 1억5000만원씩, 유족 1명에게 8000만원 등 모두 6억8000만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미쓰비시는 항소했고, 광주고법은 2015년 6월 피해자 3명에게 1억2000만원, 1명에게는 1억원, 사망한 부인과 여동생을 대신해 소송을 낸 유족에게는 1억208만원 등 모두 5억6208만원의 위자료를 미쓰비시가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미쓰비시가 같은 해 7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면서, 소송은 대법원에 계류돼 있다.

 

미쓰비시 측은 본질적으로 소송과 상관없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키기도 했다. 소장 번역문 중 한 페이지가 다른 페이지 사이에 잘못 끼워져 있다거나, ‘주차장이 협소하니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는 문구가 번역본에 없다는 점 등의 황당한 이유를 들어 3차례나 소장 접수를 거부한 것이다. 이 때문에 2014년 2월 제기한 2차 소송의 첫 재판은 35개월이 지난 2017년 1월에야 열렸고, 8월11일 배상 판결이 나오기까지 3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15년 5월 제기된 3차 소송도 지난해 11월이 돼서야 재판이 시작됐다. 지난 8월8일 광주지법은 피해자인 김영옥씨에게 1억2000만원, 고 최정례씨 유족에게는 325만6000여원의 위자료를 미쓰비시가 배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은 다른 소송 전례에 비춰 이번 판결에도 항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 확정판결 조속히 내려 달라”

 

대법원에서 멈춰 있는 소송에 대한 확정 판결을 촉구하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지난 5월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이 판결을 주저하는 사이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며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조속히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또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대법원이 최종 판단을 미루는 것에 대해 “일본과의 외교적 갈등이 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며 “지난 정부에서 외교부는 근로정신대 사건에 대해 ‘개인이 일본 민간기업을 상대로 한 사적(私的) 소송이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언급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히려 일본의 경우, 배상 책임이 없다는 정부의 입장을 담은 자료가 전범 기업들의 변호사를 통해 제출되고 있다”며 “나라가 힘없는 국민들의 고초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비판했다.

 

 

© 시사저널 미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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