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벌 동맹’ 해체를 예고한다
  •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 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17.08.26 16:39
  • 호수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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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성장기 국가경제 기여했던 재벌, 이제 새로운 시대적 요구 기로에 서

 

“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에서 헤겔의 말을 인용해 숙부인 나폴레옹의 후광으로 권력을 얻은 보나파르트 황제를 비판했다. 한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희극처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특검 수사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마치 최순실씨의 하수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을 뒤흔든 ‘국정농단 게이트’의 원인으로 최씨 대신 청와대와 재벌을 연결하는 부패 커넥션에 눈을 돌려야 한다.

 

촛불집회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공범자인 재벌 대기업 총수와 함께 법정에 섰다. 이 역사적 재판은 한국 사회를 이끈 ‘국가-재벌 동맹’의 해체를 예고하는 동시에 과거의 전통적 ‘발전국가’ 모델의 붕괴를 보여준다. 세계은행의 주목을 받은 발전국가는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고도성장을 주도하는 한편 사회를 억압하고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야누스의 모습이 드러난다. 경제성장의 이면에 인권유린·정경유착·노동억압의 어두운 그늘이 있다. 이제 과거와 결별할 때가 되었다.

 

2016년 12월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 총수들이 선서하고 있다.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대기업의 탐욕이 대기업 존립 자체 스스로 위협

 

한국의 재벌 대기업은 산업화 초기부터 저리대출·세금감면·독과점 등 엄청난 특혜로 기업제국을 건설했다. 이러한 특혜는 국민의 세금에서 나왔다. 그러나 재벌은 창업자 가족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편법상속과 순환출자로 지배구조를 장악했다. 창업자 가족은 3~4% 지분만 소유하지만 사실상 모든 계열사를 통제하고 있다. 미국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상속은 자식을 망친다”고 했지만, 재벌은 자식에게 대물림되었다.

 

고도성장기에 재벌은 도전적 기업가정신으로 국민경제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재벌 대기업은 신자유주의 논리에 따라 임금을 억제하고 직원 수를 줄여 이윤을 추구하는 전략으로 돌아섰다. 대기업의 평생고용은 무너지고, 조기퇴직으로 직원들은 불안에 시달렸다. 하청기업이 된 중소기업의 수익률은 낮아지고, 외주계약으로 비정규직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 결과는 한국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다. 이처럼 재벌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회의 미래를 말할 때 재벌 개혁을 뺄 수 없다. 하지만 재벌 개혁은 양날의 칼이다. 재벌은 외환위기 후 주범으로 몰렸지만, 재벌이 잘돼야 투자와 일자리도 늘어난다는 주장 또한 힘이 강해졌다. 그러나 미국의 공급 중시 경제학을 추종하는 학자와 관료의 주장과 달리, 지난 20년간 대기업 성장의 낙수효과는 거의 없었다는 분석을 낳고 있다. 중소기업·자영업자·비정규직의 실질소득은 계속 낮아지고, 내수 기반은 붕괴하고 있다. 마치 로마제국 말기 자영농이 대농장의 농노로 전락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결국 재벌이 만든 상품을 구입할 중산층까지 무너지고 있다. 대기업의 탐욕이 대기업의 존립 자체를 스스로 위협하는 것이다.

 

 

주주 자본주의가 재벌 개혁의 방향 될 순 없어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볼 수 있듯이 재벌 개혁을 더 이상 미룬다면 한국의 미래가 없다는 지적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재벌 총수의 비리에 대한 처벌, 소유와 경영의 분리, 전경련 해체 등에 그쳐서는 안 되며, 새로운 경제 모델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재벌 개혁 가운데 특히 삼성의 역할이 중요하다. 삼성이 한국 경제와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을 통해 경영권을 보호하는 대신, 공정거래법을 지키며 중소기업과 상생해야 하며, 노동조합을 인정해 노사협력을 추진하고, 조세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필요하면 ‘삼성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삼성의 경영을 바꾸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격한 주장이 전혀 아니며 헌법 119조에서 보장하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지키자는 것이다.

 

재벌 개혁에서 국민경제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주주 이익만 극대화하는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외환위기 직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재벌의 지배구조를 정상화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시중은행을 외국 자본에 매각하고 대우·해태·삼미 등 재벌을 전격적으로 해체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대기업과 은행의 주식을 대거 매입한 외국 자본은 더 많은 주주 배당을 요구했다. 재벌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한 시민단체의 활동은 의의가 있지만, 주주의 더 많은 배당을 요구하는 외국 자본이 사회적 책임을 갖기는 어렵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미국 경제를 지배했던 트러스트(기업결합 형태의 미국식 재벌)는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조세개혁을 통해 해체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부를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산업 구조조정을 비롯한 뉴딜을 추진하고 독점 규제법을 도입했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권리를 인정하고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 정부도 기업지배구조에만 매달리는 대신 보편적 복지국가와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국가 개혁에 나서야 한다. 선진 산업국가의 경제민주화 논쟁은 작업장 민주화, 산업 민주주의, 노동자의 경영 참가 등으로 이동했다. 협동조합, 종업원 주식소유 제도, 공유경제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경제민주화》에서 미국 경제가 기업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개탄하며,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불평등을 축소하기 위해 민주주의, 정치적 평등, 자유의 가치의 조화를 이루는 대안적 경제 모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어떻게 첨단기술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장기적 성장동력을 강화할지, 어떻게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고 우수한 인재를 키울지, 어떻게 복지제도를 확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지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재벌 총수가 물러나고, 경쟁을 늘리고, 투명성이 커진다고 경제민주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제 시장으로 넘어간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시장에는 다양한 개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소비자·중소기업·대기업이 있고, 그 정점에는 재벌이 있다. 하지만 주주 자본주의는 재벌에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다. 민주적 발전 모델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확대다. 대기업도 노동조합·소비자·시민단체와 갈등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단순한 기업지배구조의 변화를 넘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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