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쪽’ 이회창이 전하는 역대 대통령의 ‘명과 암’(上)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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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대선에 세 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만큼 역대 대통령과의 애증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 정권 때 처음 법관에 취임했다. 4․19 혁명이 터지기 한 달여 전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 혁명재판소에서 파견 근무를 했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두 차례나 대법관을 역임했다. 김영삼 정권 때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정치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어찌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이 전 총재의 정치 스승인 셈이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및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명운을 건 대선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정치 인생이 곧 한국 정치의 역사인 것이다. 그가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 눈길이 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000쪽에 달하는 회고록에는 역대 대통령의 장점과 단점, 이들과 만나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자세히 언급돼 있었다. 

 

이 전 총재도 8월22일 회고록 출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분들의 역사는 정사, 야사가 되지만 내가 있던 야당의 역사는 완전히 잊힌 역사가 됐다”며 “야당의 역사도 남길 필요가 있어 패자(敗者)의 기록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2회에 걸쳐 회고록에 묘사된 역대 대통령의 모습을 재조명해 본다. 

 

8월22일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이회창 전총리의 회고록 출판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 ‘인간 존엄성’ 훼손한 이승만․박정희 

 

이 전 총재가 기억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시대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는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었다. 그는 1960년 공군법무관을 마치고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판사로 부임했다. 당시 친구와 함께 덕수궁 앞을 지나는 데, 광화문 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나타났다. 그러자 경찰이 길 가던 행인을 모두 붙잡고 박수를 치게 했다. 당시 이 전 총재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덕수궁 파출소로 연행됐다. 

 

그는 “파출소에 끌려가 ‘빨갱이 아니냐’며 갖은 모욕을 당했다. 나중에 신분을 밝히고 풀려나긴 했지만, 개인의 존엄성 같은 것은 아예 무시되는 시기였다”며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국가의 형태는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권력의 행사가 정의를 잃어버릴 때는 동요하게 된다”고 말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에 의해 막을 내렸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는 ‘혁명과업수행’을 명분으로 사법부에도 군인 감독관을 파견했다. 이 전 총재 역시 계엄군법회의와 혁명재판소에 파견돼 근무를 했고, 소속 재판부에 이른바 민족일보 사건이 배당됐다. 조용수 사장이 재일 간첩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당시 이 전 총재는 자금 제공자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불분명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혁명검찰부부장이던 박창암 대령과 언쟁을 벌였다. 

 

 

그는 “‘너 같은 판사들 때문에 혁명을 한 것’이라는 폭언까지 들었다. 며칠 후 박 부장이 사과의 뜻을 전해오고, 증거도 보완 제출되면서 이 문제는 조용히 마무리됐다”며 “그럼에도 조 사장이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막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물론 암울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조 보수’라는 별칭답게 그는 두 전직 대통령의 긍정적인 업적 또한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 후 한국은 좌우 진영의 극심한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격렬한 반대에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단독정부가 아니라 남북합작을 주장하는 반대 세력의 주장에 휩쓸려 정부 수립을 늦췄다면 대한민국은 영영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그는 회고록에 언급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경제성장의 토대를 닦은 업적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실정(失政)과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전 총재는 “박 전 대통령은 군을 동원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단순히 권력을 향유하는 데 그친 정치군인이 아니라 나라를 바꾼 경세가였다”고 말했다.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성격 ‘극과 극’  

 

이 전 총재는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 때 두 차례나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을 역임했다.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1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대법원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겸했다가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법원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 변호사로 개업한지 2년3개월 정도 흐를 때였다. 노태우 정부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이일규씨가 찾아와 대법관 자리를 제의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이 대법원장이 재삼 간정해 받아들였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시절 민주화합위원회에 참여해 대법관에 다시 발탁된 것처럼 보도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그는 설명했다.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그가 기억하는 두 전직 대통령의 성정은 극과 극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그는 감사원장에 발탁됐다. 그는 ‘율곡사업’ 감사와 ‘평와의 댐’ 감사를 지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벌였던 주요 사업이었다. 당시 국방부는 자체 조사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원 감사가 다시 시작될 경우 전 정권에 대한 압박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적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도 나서 “조사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했을 정도다. 

 

 

이 전 총재는 국무총리가 된 후 전직 대통령을 예방한 일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감사원장으로 있을 때 직책상 고통을 드린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은 “아, 괜찮아요. 감사원장으로 하실 일을 하신 건데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떠날 때도 똑같은 인사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실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고 대답했다. 각각의 대답에 두 인사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호방한 성격을 보인 반면, 노 전 대통령은 당시의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솔직하게 나타낸 것으로 그는 평가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이상주의자면서 동물적 후각 가져”

 

이 전 총재는 김영삼 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때문에 회고록에도 비교적 많은 부분을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그 스스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에 오른 데서부터 비롯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전 총재가 김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 2월이었다. 14대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이 전 총재와 오찬을 함께 하며 감사원장직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소탈하고 친화력이 있어 보인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첫인상이었다. 특히 “자신이 이끌 새 정부의 부패척결과 기강확립에 관한 열정과 진정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1993년 12월17일 김영삼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당시 신임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당시 대법관직을 두 번 역임했고, 두 번째 임기 역시 1년여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감사원장으로 가게 될 경우 권력에 가까이 가게 되거나, 명리를 추구하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감사원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기성 정치인이 ‘개혁’이나 ‘부정부패 척결’을 언급했다면 정치적 수사(修辭)나 허풍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성 정치인에게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느꼈다”며 “뒤에 알게 됐지만 김 전 대통령은 동물 같은 정치적 후각을 가졌으면서 약간의 이상주의자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감사원장 시절 그는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앞서 언급한 전 대통령들의 조사라든가 안기부 조사 등 일부는 대통령과 견해가 달랐지만, 차분히 설명하면 더 이상 고집을 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와대 등 외부로부터의 낙하산 인사를 근절할 수 있도록 해준 김 전 대통령에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1993년 8월 그는 대법원장직의 제의를 받게 된다.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8월 말쯤 대법원장의 사표를 받고 9월 초에 후임 발표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9월 초 주례회동에서 돌연 말을 바꿨다. 대법원장이 임기 중에 사임하는 것은 헌법상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안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참았다.

 

이후 김덕주 대법원장이 신고한 재산이 구설에 오르면서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이 전 총재에게 다시 대법원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신뢰성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얼마 후 오해는 풀렸고, 이 전 총재는 그해 말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 문제를 놓고 김 전 대통령과 이 전 총재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대통령 면담 과정에서 고성이 오갈 정도였다. 결국 이 전 총재가 사퇴를 하는 것으로 언쟁은 마무리됐다. 이 전 총재는 “총리 경질에 대한 언론의 비난과 비판이 커지자 청와대 및 민자당은 별의별 유치한 인신 공격성 발언을 일제히 쏟아냈다”며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 회고록에서 ‘잘못했으니 한 번 만 더 기회를 달라고 시종일관 변명으로 일관했다’고 언급해 불쾌했다.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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