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쪽’ 이회창이 전하는 역대 대통령의 ‘명과 암’(下)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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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대선에 세 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만큼 역대 대통령과의 애증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 정권 때 처음 법관에 취임했다. 4․19 혁명이 터지기 한 달여 전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 혁명재판소에서 파견 근무를 했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두 차례나 대법관을 역임했다. 김영삼 정권 때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정치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어찌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이 전 총재의 정치 스승인 셈이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및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명운을 건 대선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정치 인생이 곧 한국 정치의 역사인 것이다. 그가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 눈길이 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000쪽에 달하는 회고록에는 역대 대통령의 장점과 단점, 이들과 만나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자세히 언급돼 있었다. 

 

이 전 총재도 8월22일 회고록 출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분들의 역사는 정사, 야사가 되지만 내가 있던 야당의 역사는 완전히 잊힌 역사가 됐다”며 “야당의 역사도 남길 필요가 있어 패자(敗者)의 기록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2회에 걸쳐 회고록에 묘사된 역대 대통령의 모습을 재조명해 본다. 

 

8월22일 오후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이회창 전총리의 회고록 출판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 김대중 전 대통령 “능력 있지만 실패한 대통령”

 

이 회장 전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 맞붙었다가 1.6% 차이로 아쉽게 패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서 “DJP 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결과적으로 이 연대는 대통령이 된 후 족쇄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DJP 연합을 성사시켰지만 합의 조건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해줄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본다”며 “대통령이 된 후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두 인사의 불협화음은 김대중 정권의 동력을 크게 떨어트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원내 2당이었다.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과 무소속 일부를 합쳐야 겨우 과반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 대통령은 원래 1당인 한나라당에 대해 의원 빼가기와 사정으로 일관했다. 이후 자민련 등과의 공조로 과반수를 만든 뒤부터 과거 군사정권 못지않은 일방적 강행처리를 수시로 자행했다. 심지어 ‘의원 꿔주기’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당 소속 의원을 탈당시킨 뒤, 자민련에 입당시켰다. 여당 내에서조차 반발이 일었고, 권력 누수를 가속화시키면서 임기 말에는 국정수행 동력이 거의 소진됐다는 것이다. 

 

김 전 총재는 “개인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능력이 있고, 대통령직에 대한 그 나름의 열정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재임 중에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해 더할 수 없는 영예까지 얻었다”면서도 “대통령으로써 업무수행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다르다. DJP 연합으로 국정수행의 족쇄를 스스로 자초했다”고 말했다. 

 

1998년 11월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대북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주의의 정체성과 원칙이 실종된 대북 정책으로 북한이 오늘날과 같은 핵무기 및 미사일 강국이 되는 것을 도와준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북 정책 기조는 ‘햇볕정책’이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설 등 북한과 지원․교류를 확대했다. 

 

뒤이은 노무현 정권도 이 ‘햇볕정책’을 이어 받았다. 두 대통령 모두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도 가졌다. 이렇게 10년 동안 북한에 조건 없이 지원․협력했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핵개발을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핵무기를 고도화했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는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더욱 악화됐다는 것. 

 

김정일 위원장의 치밀하게 계산된 사기극이었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도와준 결과가 됐다고 이 전 총재는 평가했다. 그는 “두 대통령의 대북 인식이 기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햇볕정책은 이런 잘못된 기본 인식에서 나온 결과물이다”고 말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뛰어난 언변과 돌출행동으로 존재감 과시”

 

이 전 총재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정치에 입문한 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제3자의 관점’이란 조건을 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평가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정치에 들어온 지 꽤 오래 됐음에도 연륜에 알맞은 기반을 잡지 못했다.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런 사람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바람이 불 때 편승해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데 능하다”며 “김대중이라는 큰 기둥이 뒤로 물러나면서 민주당은 국민경선이란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 그 동안 변방에서 돌았던 그가 이 변화의 바람에 나타나 차기 대선주자로 부상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실시된 6․13 지방선거를 앞둘 때였다. 광주 경선에서 시작된 ‘노풍’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노 후보는 돌출 행동을 보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6․13 지방선거에 나갈 부산시장의 후보 선택권을 위임한 것이다. 그는 “부산 민주계의 지지를 얻어 득표해보자는 계산이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2002년 3월9일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선출 제주경선대회에서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이후 노 후보와 이 전 총재의 지지율 격차는 갈수록 좁혀졌다. 5월에는 지지율이 역전됐고, 다음 달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전국 16개 시도지사 중 한나라당은 11곳에서 승리했다. 민주당은 호남과 충정 지역을 겨우 확보하는 데 그쳤다. ‘노풍’ 역시 가라앉으면서 민주당 내에서는 ‘후보 교체론’과 ‘제3후보 영입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3후보로 2002년 한일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으며 지지율이 급상승한 정몽준 의원이 꼽혔다. 

 

11월15일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이 전 총재는 2, 3위의 후보끼리 단일화를 해도 판을 뒤집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오판이었다. 양 측은 TV 토론을 거쳐 여론조사 방식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기로 합의했고, 노 후보가 단일화 후보로 추대됐다. 국민들은 또 하나의 역전 드라마에 크게 열광했지만 이 전 총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노무현 후보는 밀리고 있는 처지였다. 세 후보 중에서도 3위였고, 당내에서는 후보 교체론에 시달리고 있었다”며 “불리한 처지에 있던 노 후보는 건곤일척 모험수로 정 후보와의 TV 토론과 여론조사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이 적중했다. 마치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있던 도박사가 모든 것을 한 판 승부에 걸어 도박판을 휩쓰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실질에 대해 너무 몰라”

 

이 전 총재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였다.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을 찾아와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부 언론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기를 대구 달성구 보선에 출마한 1998년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바로 나”라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다수파라 할 수 있는 YS 계열의 민주계는 反(반) 박정희 정서가 강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정치 하에서 투옥되거나 처벌 받은 경력이 있는 의원들은 박 전 대통령의 입당에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그가 당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받아들였고, 부총재로 지명했다. 이 전 총재는 “일부 언론에서 DJP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성 보도를 냈다. 당시 그가 그런 정도의 지지세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동료 의원들과 어울리거나 섞이지 않았다. 혼자 움직이며 언론이나 여론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선점해 당내 입지와 존재감을 키우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자신의 소신이나 고집을 관철하는 기질 만큼은 대통령으로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17년 3월30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국정운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곧 실망했다. 특히 그가 집권당의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에 대해 ‘배신의 정치’ 운운하면서 공개적으로 매도하고, 원내대표직에서도 사퇴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소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이 왜 배신자로 낙인찍히는지 이해가 안됐다”며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터지고 탄핵 사태로까지 진전되는 상황을 보면서 ‘그가 실질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실감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부모가 모두 총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청와대를 나와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정치에 입문했다. 이 전 총재는 “그가 이 파란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강한 집념과 열정을 키워온 것으로 짐작했다”며 “이후 원하는 대로 대통령이 됐지만 ‘대통령의 일’에 대한 정열과 책임감, 판단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이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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