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배운’ 여자들이 ‘못 배운’ 남자들 가르치려 든다고요?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04 17:00
  • 호수 14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차 계몽주의로서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도 가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친구로부터 연세 지긋하신 남성 박사가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부모 성(姓) 쓰기’ 하는 여성들이 정말 싫다는 말로 시작해 돈 많고 학벌 좋은 여성들이 가난하고 못 배운 남성들을 가르치려 드는 일이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들을 비교적 젊은 남성들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으나, 연세 있는 남성들도 저런 이야기를 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이런 발언에 대해 뭐라고 대응해야 할까. 페미니즘은 가르치려 드는 것? 내가 친구 대신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교수님, 잘못 아셨어요. 페미니즘은 돈 많고 학벌 좋은 여성들이 가난하고 못 배운 남성들을 가르치려 드는 일이 아니라 바로 교수님처럼 잘 배우고 부유한 남성들이 가난하고 못 배운 남성들보다도 훨씬 뭘 모른다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에요.”

 

페미니즘은 ‘배운 여자’들의 오지랖이 아니다. 오히려 사방에서 가르쳐야 한다. 남녀 모두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꼭 필요하다. 유엔 여성 친선대사인 할리우드 여배우 엠마 왓슨이 2014년 9월 유엔 총회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 사진=AP연합

 

계몽주의 혜택을 입은 21세기

 

모든 몰랐던 일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는가? 배우지 않고 저절로 알게 되는가? 누군가가 가르치지 않았는데 저절로 배우기도 하는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인간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동력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마을에서, 우리는 미래 세대를 가르친다. 우리 세대가 기꺼이 과거가 되기 위한 준비와 투자를 열심히 한다. 그러므로 가르친다는 말 자체를 거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SNS에서 제일 심한 욕 중 하나가 가르치려 든다는 말인 듯하다. 고상하게 계몽주의라는 말도 쓴다. 최대한의 비난을 담아서다. 왜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모르는 것이 없거나 또는 배울 것이 없는 완벽한 개체들이 됐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몰라도 아무 상관없는 무용지물들이 됐거나.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어휘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자유? 인권? 민주주의? 평등? 정의? 개인의 존엄성? 또? 

이 모든 말들은 흡사 천부인권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유전자에 아로새겨졌다가 말을 배울 무렵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온 말들일까. 당연히 저 말들은 천부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포함해, 계몽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친 말이다. 계몽주의 또는 계몽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할 순 없겠지만, 사람들이 자주 참고하는 위키피디아를 따라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명료하고 자명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낙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대정신’이라고 해 보자.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류는 바로 이러한 계몽주의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다. 계몽의 기획 또는 근대의 기획은 근대적 공동체 또는 시민사회를 낳았고 근대민족국가를 형성했으며 그 밖에도 개인의 능력에 기반해 시장경제를 자본주의로 변화시켰다.

 

이렇게 정리해 가다 보면 재미있는 말들이 드러난다.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점은 인간을 신 앞의 단독자로 서게 한 점이라고 누가 그랬는데, 누가 말한 건지는 잊어버렸다. 하여간, 우리는 중세를 신본주의 시대라 부르고 근대를 인본주의 시대라 부른다. 문제는, 인본주의에 기반한 계몽의 시기가 너무 빨리 타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에 이어 자본주의 시대가 왔다. 계몽의 시대가 빚어놓은 인간존재의 눈부심이, 돈의 위력에 가려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성인 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남성 홀로였다는 점을 꼽는다. 근대의 계몽주의적 이성은 보편을 결정하는 주체로 유럽 백인남성 지식인이라는 모형을 제시했다. 저절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줄서기가 생겨난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재구성되고, 또는 구조화되고, 그 구조의 윗단에는 백-남성-선함-빛-제국주의적 식민종주국의 계열체가, 아랫단에는 흑-여성-악함-어둠-피지배되는 식민지의 계열체가 들어선다. 이름하여 흑백이분법, 보다 광범위하게는 남녀이분법이다. 엄청나게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가부장제의 도식은 알고 보면 계몽 이후의 산물이다.

 

 

내재된 차별과 폭력 제거해야

 

반쪽이 눌려 납작해진 인간은 돈의 위력에 맞설 수가 없고, 근대 이후 세계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닌 신의 지배를 탈출해 인간이 아닌 돈의 지배로 뛰어든 꼴이 됐다. 이것은 미신 못지않은 맹신이고,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그 깨어남을 위한 새로운 도구가 바로 페미니즘이라고 나는 지금 말하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그러므로 여성도 인간이라는 범주에로 회복돼야 한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페미니즘을 제2차 계몽주의라 부르고자 한다. 신의 부속물이었던 인간을 이성의 힘으로 해방한 것이 1차 계몽주의였다면, 제2의 성에 불과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인류의 절반이 되고,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제대로 단독자가 되는 일이 2차 계몽주의의 목표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치스럽다. 아직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한 여성이 인간 대접 좀 받자는 게 페미니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고작 이런 주장을 하려고 참 많은 여성들이 죽고 다치고 했는데 교수님은 고작 한다는 소리가 “가르치려 든다”라니. 가르치는 일을 남자만 해야 하나.

 

오히려, 페미니즘을 사방에서 가르쳐야 한다. 돈 많고 학벌 좋은 여성들뿐 아니라,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들이 돈 많고 학벌 좋은 남성들의 성적 대상이거나 시중꾼이 아니라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임을 가르치는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이라고 계몽해야 한다. 가난하고 못 배운 남성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가장 도움을 주는 사상이 바로 페미니즘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1차 계몽주의는 신적 질서 안에 통합돼 있던 세상을 인간의 질서로 구획을 했다. 가부장적 질서로 무장한 산업사회가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이은 전쟁의 모습으로 몰려왔다. 여성, 아동, 장애인, 노약자 등의 이름으로 집합명사화된 약자들이 가부장적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희생물이 된다.

 

2차 계몽주의는, 그러한 구획에 내재된 차별과 폭력을 제거해 나가기 위한 기획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저마다의 다른 점을 뽐내며 서로 충돌하지 않고 줄을 서거나 세우지도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반짝거리기. 말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실제로 어떻게 해야 너도나도 반짝거릴 수 있는가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그러한 시도가 옳다고 말함으로써 그 첫걸음을 떼려는 것이 페미니즘이고, 그것도 시시한, 시시콜콜한 페미니즘이고, 페미니즘으로 하는 정치고, 인간관계의 힘의 논리를 바꾸자는 것이 정치를 페미니즘화하는 것이고…라는 것이 이 연재의 중간 결산이다. 너무 계몽적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