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왕’ 꿈꾼 박건배 전 해태 회장 재기 물거품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7.09.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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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와인 1위 기업 금양인터, 옛 삼환기업 계열사에 매각

 

국내 1위 와인 유통 기업 금양인터내셔날의 경영권이 최근 매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양인터내셔날은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아들인 박재범 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여서 경영권 매각을 놓고 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와인업계 관계자는 “올 6월 옛 삼환기업 계열사였던 건설업체 까뮤이앤씨(옛 삼환까뮤)가 금양인터내셔날 지분을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와인업계에 따르면, 올 6월 까뮤이앤씨는 자회사를 통해 금양인터내셔날 지분 79.34%를 사들였다. 2016년 말 감사보고서를 토대로 보면, 이 회사의 최대 주주는 지분 33.14%를 보유한 박재범 대표다. 박 대표는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미국 뉴욕대 스턴스쿨에서 MBA(경영학석사) 학위를 받은 박 대표는 2006년 이 회사 전무로 들어와 부사장을 거쳐 2010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박 대표는 실제로 와인 기사작위까지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금양인터내셔날은 박 대표와 황영진 대표의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돼 왔다. 황영진 대표와 박재범 대표는 국내․해외영업으로 역할이 구분돼 있었다. 박재범 대표는 사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해외 유명 와이너리를 방문해 국내 수입을 타진하는 등 해외 마케팅을 주도해왔다. 회사 관계자는 “입사 전부터 해외 유명 와이너리쪽에 상당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등 와인 시장에 대한 식견이 탁월했다”면서 “회사가 최종 매각된 이후에는 직원들에게 ‘앞으로 건투를 빈다’는 짤막한 인사말만 남기고 퇴사했다”고 설명했다.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 사진=연합뉴스


 

장남 박재범 사장이 금양인터 경영 주도  

 

이번 경영권 매각에는 2대주주인 플러스 F&C의 지분도 함께 넘겨졌다. 플러스F&C는 1997년 해태그룹이 해체될 당시 설립된 구조조정 목적의 해태그룹 계열사다. 사실상 박건배 회장 개인 회사이기도 하다. 박 대표가 2010년 경영권을 넘겨받으며 회사 경영 전면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부친 박 전 회장의 측면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과거 삼환기업 계열사였던 까뮤이앤씨는 건설과 도‧소매업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다. 지난해 이 회사의 매출액은 690억원으로 2015년 731억원에 비해 감소 59억원 가량 줄었다.


금양인터내셔날은 영업이익이나 당기순이익은 소폭 늘어났고, 매출액 하락폭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매각 과정에서 관련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꾸준하게 성장해오던 매출액이 처음으로 하락세로 돌아섰다는 점이다. 수입 와인 유통업은 국내 주류 산업의 한 축으로 성장할 정도로 커졌지만, 수익성은 매출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 한 대형와인유통 관계자는 “매년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우리 와인 수입 시장이 이웃 일본처럼 안정세를 찾으면서 대형업체들마다 상당한 자금 압박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양인터내셔날은 1989년 설립된 해태산업의 수입주류 자회사가 출발이다. 1999년 해태그룹이 해체되면서 직원들의 퇴직금으로 주식을 인수해 새롭게 출범했다. 금양인터내셔날이 와인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2000년대 중반 수입 와인유통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부터다. 주말 골프 애호가들 사이 18홀에 65타를 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신다고 알려져 숫자형 브랜드 마케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 ‘1865’를 비롯해 미국 내 최대 판매량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와인 ‘루피노’ 등이 금양인터내셔날을 통해 수입됐다. 시장점유율로 치면 국내 1위다. 와인 외에도 금양인터내셔날은 꼬냑·브랜디 등을 수입, 판매하고 있으며 브랜드로 치면 800여 종을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매출에서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95%에 달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박재범 사장 전까지 회사 경영을 책임진 김양한 전 대표 역시 해태그룹 재무팀 출신이다. 지금도 금양인터내셔날에는 해태그룹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 근무하고 있다. 또 다른 대형 와인 업체 마케팅 담당자도 “1865와 같은 대중 브랜드 대신 특이하고 독특한 와인을 찾는 애호가들이 늘어나면서 금양이 와인 판매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왔다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신세계, 롯데 등이 별도의 와인 수입사를 세우거나 인수해 운영한 것도 금양인터내셔날의 영업력이 위축된 요인으로 풀이된다. 신세계, 롯데 등은 이마트, 롯데마트 등 자체 대형할인점을 통해 물건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유리하다.

 
금양인터내셔날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의 재기도 사실상 힘들어졌다는 분석이다. 1948년생인 박 전 회장은 1997년 해태그룹이 해체된 이후 사실상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갔다. 재계에서는 박 전 회장이 직접적이지는 않겠지만, 아들인 박재범 사장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영활동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했다. 플러스F&C가 금양인터내셔날의 2대 주주로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해태는 1945년 박병규 창업주(박건배 전 회장의 부친), 민후식 전 해태유업 회장, 신덕발 해태관광 전 회장, 한달성씨 등이 함께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영강제과에서 출발한다. 제과·음료 등으로 사세를 키우던 중 계열사인 해태유업과 해태관광은 1977년 박병규 창업주의 타계로 경영권이 박건배 회장에게 넘겨가자 그룹에서 분리됐다.

 

프로골퍼 최나연 선수가 2015년 연말을 맞이해 불우이웃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빨간 모자가 씌워진 칠레산 와인 '1865'를 소개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해태, IMF 직전 무리한 M&A로 그룹 해체 

 

두 회사 중 해태유업은 2005년 동원그룹에 팔렸다. 해태관광은 ㈜큰길이라는 회사로 사명을 바꿔 고속도로 휴게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은 것은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이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 한계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논의되면서 해태기획(1981년)‧해태유통(1982년)‧해태건설(1990년) 신설, 인켈(1994년) 인수 등으로 사세를 키워 1997년 재계서열 24위까지 오른 해태그룹은 주요 계열사가 부도 및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박 회장도 경영권을 반납하고 해태제과 이사회 의장으로만 지내다 2000년 5월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하지만 2000년 8월 분식회계를 통해 회사자금 2300억원을 부당 대출받았고, 위장계열사 6곳의 회사자금 3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2008년 재판도중 법정 구속됐다. 이후 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던 박 전 회장은 2010년 8‧15광복절을 앞두고 경제인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돼 풀려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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