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폭이 짧아지면 치매 의심해야”
  • 김철수 가정의학과 전문의·한의사·치매전문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02 12:20
  • 호수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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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의 진료 톡톡] ‘피질하혈관 치매’의 치료

 

H교수는 구두를 신을 때 끈을 매기가 힘들다. 작년에 정년퇴직한 그는 오랫동안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는 습성이 몸에 밴 사람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움직임이 둔해지고 잘 넘어지기도 해 끈으로 단단히 조이는 신발을 주로 신지만 허리가 잘 구부러지지 않아 신발끈을 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걷는 모습도 부자연스러워지고 보폭도 짧아져 약간 뒤뚱거리는 모양새가 됐다. 말을 내뱉는 것도 힘들어 보이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많이 흘리며 기억력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 시사저널 포토

 

당귀로 어혈 없애는 치료 시행

 

매일 보는 사람들은 조금씩 서서히 나빠진 그의 변화를 크게 느끼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나 친인척들은 그의 상태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MRI(자기공명영상) 검사를 해 보니 뇌가 전반적으로 조금씩 쪼그라들었고, 이로 인해 뇌를 보호하는 물주머니 같은 뇌실이 조금 커진 모습이었다. 기억 중추인 해마도 쪼그라들면서 공간이 꽤 생겼다. 하지만 이러한 MRI 영상과는 달리 H교수의 기억력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워낙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평소에 머리를 많이 사용해 기억과 관련되는 신경의 교통로가 잘 발달돼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소뇌는 약간 위축돼 있으며 백질의 여러 곳에 아주 작은 뇌경색 흔적들이 보이고 변성(변질)된 흔적들도 보였다. 검사상으로는 피질하경색 치매가 꽤 진행된 상태였다. 뇌의 안쪽 백질은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섬유가 지나가는 곳이며 운동 기능을 조절하는 기저핵이 있는 부위다. 이곳이 나빠지면 파킨슨증후군이 생기거나 균형 감각이 떨어지고 부드러운 동작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운동 기능이 떨어져 굼뜨거나 종종걸음을 하며 소변을 실수하기도 한다.

 

H교수는 걸음걸이가 느리긴 했지만 손을 떨지 않고 표정도 밝았다. 다행히 검사 결과에 비해 아직 파킨슨 증상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였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긴 하지만 과음하지 않았다. 과체중도 아니고 당뇨도 없으며 고지혈증도 없고 평소 운동도 즐기는 편이다. 가끔 속이 니글거리거나 어지러울 때가 있고 가벼운 편두통이 지나갈 때도 있지만 불면으로 고생한 적은 없었다. 부모·형제 중에 중풍이나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환자가 없으며 치매에 걸린 사람도 없었다. 유전적으로 치매와는 거리가 멀고, 혈관질환을 일으킬 만한 근거도 없었다. 굳이 이유를 따지고 들자면 오랜 외국 생활이 맞지 않아 조금 힘들었던 것뿐이다.

 

H교수는 알츠하이머 치매와 피질하혈관 치매가 진행 중이었다. 알츠하이머 치매의 증상은 뚜렷하지 않지만 피질하혈관 치매 증상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당귀, 천궁, 도인 등으로 어혈을 없애고 반하 등으로 담을 제거해 혈액순환을 개선하고 뇌 손상의 진행을 막고, 숙지황 등 약재로 활력이 떨어진 뇌세포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치료를 시작했다.

 

치료를 시작한 지 석 달이 지난 지금 혈액검사 결과가 좋으며, 굼뜨지 않고 움직임이 가벼워졌으며, 넘어지지도 않고 말도 조금 빨라졌다. 머리도 맑아지고 예전처럼 피곤하지 않으며, 기억력도 좋아졌는지 친구들 이름도 잘 떠오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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