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조사 기록에 담긴 그들만의 질서
  • 이인자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02 15:14
  • 호수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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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편집자 주]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이인자 교수는 재일교포·묘제(墓制) 연구의 권위자이며 동일본대지진 연구에서 세계 일인자로 평가받는 석학(碩學)이다. 이 교수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후 피해지역을 답사하며 재난에서 살아남은 희생자 유족과 생존자들의 정서적 피해와 복구에 대해 연구해 왔다.

 

‘다카하시 류노스케  1圓(엔), 다카하시 도라오 30銭(센), 다케야마 쇼이치 10銭, 지바 유노스케 술 2병’(결혼축의수납장 메이지 38년(1905년) 4월16일).

이시노마키(石卷)시 오카와무라(大川村)에 살고 있는 다카하시 다케야(高橋竹也·71)씨 집안에 내려오는 경조사 기록의 일부입니다. 다케야씨의 증조부 결혼식 축의금 목록입니다. “마을에 경조사가 있을 때 불단(佛壇) 서랍을 열고 예전에 그 집에서 얼마 부조했는지를 살피고 그에 맞게 부조를 하지요. 그래서 아주 중요한 기록입니다. 대대로 이 기록은 남자가 관리하며 지금은 컴퓨터 엑셀에 넣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54년 2월8일 이리가마야 사토오 도라오 출산 3000엔, 2월12일 이리가마야 다카하시 쓰요시 병문안 2000엔, 54년 8월1일 나오미 탄생 다케야먀 사카리 3000엔, 다케야마 마사모리 3000엔, 다케야마 사카오 3000엔 생선(가쓰오) 1마리, 오타나베 마사요시 5000엔 옷’.

다카하시씨 옆집에 사는 다케야마 기요지씨의 부인 레이코씨(63)가 결혼해 살림을 물려받은 1979년부터 기록한 현대판 경조사 장부입니다. “예전하고 달라 경조사가 늘어나고 그걸 남기기 위해 기록을 하기 시작했어요. 가계부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실제로 경조사가 있을 경우에는 이 기록을 살피고 하게 되지요.”

 

한 집안의 장남이 결혼해 집을 짓기까지의 과정에서 받은 축의금 내역 © 사진=이인자 제공

 

조상들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행적 그대로 따라 해

 

동일본대지진 피해지역을 조사하던 2년 전 여름, 쓰나미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마을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찾은, 쓰나미 피해 전의 마을 모습을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들입니다. 이미 마을과 집을 잃은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가설주택에 살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상태였습니다. 거기서 말로만 듣던 경조사 기록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다카하시씨 집처럼 잘 보관하고 있는 집은 메이지(明治) 시대의 기록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경조사 기록을 보여주면서 모두 같은 설명을 합니다. “지금 나 개인과 상대의 관계로 금액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과 그 집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사귐에 따라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지요.”

 

아주 오래된 기록을 보면 돈뿐만 아니라 술이나 쌀 등 음식을 가져온 내용도 꼼꼼하게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 언제 큰일을 도와줬는지, 상을 치를 때 어떤 순서로 장례 행렬에 섰는지, 결혼식에서의 앉는 순서는 어떻게 됐는지 등 심혈을 기울여 쓴 기록도 있었습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후 싸움을 하는 경우가 많고 잘못해 친족 관계에 금이 가는 경우가 있어요. 앉는 순서나 서 있는 순서를 잘못하면 굉장히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이런 기록을 남겨 다음에 큰일을 치를 후손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

 

조사 내내 도와주신 다카하시 요시오(高橋芳夫·69)씨의 설명입니다. 각 집마다 보관하고 있는 양은 다르지만 주로 관혼상제와 관련한 것이 많고, 집을 새로 지어 상량했을 때, 그리고 집들이를 할 때의 기록도 있습니다. 현대 들어서는 레이코씨의 기록처럼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었습니다. 노트 왼쪽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출한 내역, 오른쪽에는 들어온 선물과 돈에 대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가족 누구라도 열어 볼 수 있는 불단 주변에 있는 서랍에 넣어 놓고 있습니다.

 

주고받은 금액 등을 자세히 보면 같은 금액을 주고받진 않습니다. 본가 장손은 작은집에 많은 금액을 주지만 작은집은 조금 적어도 좋습니다. 현대에 오면서 거의 같은 금액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놀라웠던 것은 평소에 노골적으로 험담에 가까운 말을 옮기는 사람들이라도 옛 어른들이 정한 금액으로 증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서로 앙숙이 된 듯 보이지만 예전의 조상들이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간 행적을 그대로 따라 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것이 그들의 질서처럼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취향이 맞지 않거나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어도 그곳에 살고 있는 이상 조상이 만든 질서에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따라 합니다.

 

오래된 경조사 기록 © 사진=이인자 제공

 

옛 마을의 질서, 구승으로 남겨 일상화

 

그것만이 아닙니다. 재해지역에 들어가 조사를 할 때 이런 옛날 얘기를 들었습니다. “옛날에 저 집이 그물을 갖고 있는 집이었어. 그 그물집에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을 했어. 그물을 던지기 위해 산 위에서 망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 까맣게 물고기가 밀려오는 것을 보면 횃불로 알려 투망을 했어. 그 망보는 사람은 아주 영리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됐는데 우리 집이 대대로 그 일을 했어.” 60세를 갓 넘긴 마을 분의 얘기입니다.

 

독자 여러분이 이런 말을 들으셨다면 이 얘기가 언제 적 얘기라고 느껴지시는지요. 저는 아무리 오래됐어도 50여 년 전의 일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물어보니 100여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100년이 지난 얘기를 마치 자신이 경험한 듯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기록과 함께 마을 내에 형성된 스토리텔링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물 주인은 마을에서 항상 유지로 있었기에 베풀어야 합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특별히 대합니다.

 

지금은 집수리 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물집인 그의 조상에게 대대로 신세를 많이 졌다며 그에게 일을 맡깁니다. 또한 뭔가 도와야 할 일이 있으면 무상으로 가서 돕습니다. 이런 모습이 자칫 상하관계로 보여 재해지역에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몰려온 외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도쿄에서 봉사활동을 위해 온 나카가와 지즈루(中川千鶴·41)씨는 생업을 잃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촌 주민을 위해 수제공예품을 고안해 여성들에게 만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수입의 분배에 분노하게 됩니다. 그 마을에서 ‘선장집’이라 불리는 유력 집안의 부인이 판매된 물건의 수입을 마음대로 분배한다는 것입니다. 잘 만드는 사람이 많이 가져간다는 분배의 상식을 저버리고 지금까지의 마을 질서에 준한(선장집 부인의 계산) 분배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녀만이 유리한 계산은 아니었습니다. 지즈루씨는 악습이라 여기고 개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지즈루씨가 납득이 안 된다는 듯이 펄펄 뛰면 그 자리에서는 장단을 맞춰주지만 선장집 부인에게 따지거나 그 시스템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지요. 이에 스트레스를 받던 지즈루씨는 몇 명의 부인들을 교육(?)시켜 만든 만큼 수입을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바꾸는 데 성공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활동이 아예 자취를 감추게 됐습니다. 수입을 얻는 것은 좋은데 그로 인해 지금까지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마을 전체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 마을 여성들이 지즈루씨 활동에 모이지 않게 된 것이지요. 일본어에 ‘시가라미’(柵)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속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인가 흘러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釘·못)을 박거나 울타리를 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100년 넘게 증여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일, 그리고 옛 마을의 질서를 구승(口承)으로 어제 일처럼 남기고 일상화하는 이런 모습들이 당대의 관계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흘러 내려가 버리지 못하게 후손에게 남긴 정과 울타리처럼 느껴집니다.

 

그들은 높게는 10대에 걸쳐, 낮게는 3대에 걸쳐 마을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가슴에 품으면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 선진국인 일본의 한 귀퉁이에 자칫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들만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에 저는 흥분하게 되고 호기심과 탐구심을 잃지 않게 되는 듯합니다. 한국 사회가 오래전 조상이 어떤 위대한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토록 하기 위해 족보를 비롯해 묘표 등에 기록을 남겨 현재를 사는 자손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면, 일본은 오래전 조상이 마을 사람과 어떻게  교제를 하고 역할을 했는지를 기록과 구승으로 남겨 이정표로 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 다 그것들을 중시하는 사람들만의 얘기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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