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말고 생장으로 고향에 묻어 달라”
  • 이인자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06 11:40
  • 호수 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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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고내리친목회 90주년… 조국·고향 찾게 한 유언

 

[편집자 주]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이인자 교수는 재일교포·묘제(墓制) 연구의 권위자이며 동일본대지진 연구에서 세계 일인자로 평가받는 석학(碩學)이다. 이 교수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후 피해지역을 답사하며 재난에서 살아남은 희생자 유족과 생존자들의 정서적 피해와 복구에 대해 연구해 왔다.

 

“우리 집안 할아버지가 고내리에서 도쿄로 온 지 100년이 됐군요.”

(오순길 고내리친목회 90주년준비위원)

 

10월15일 도쿄 닛포리(日暮里)의 한 호텔에서 일본에 온 지 100년이 된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의 친목회 결성 9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1세에서 5세까지 120여 명의 회원이 모여 축하회가 열렸습니다. 마을 단위의 친목회로는 아주 드물게 주일본 대사관의 이찬범 총영사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여러 임원들이 참석하면서 친목회 분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해 덩달아 ‘높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감정이입이 되는 게 제가 고내리친목회 분들과 사귄 지 22년이나 되거든요.

 

“10년 후엔 친목회 결성 100주년이 됩니다. 제 나이 84세, 그때는 94세입니다. 설마 그때까지 살고 싶다는 이야기는 못 하지만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장이 되고 싶습니다(박수 환호). 만약 그게 어렵다면 제 장남 고슈이치(홍수일)에게 이 꿈을 맡기겠습니다(박수 갈채). 이건 제 유언입니다(박수 환호).”

그날 참석한 회원들 중에 가장 선배 격인 홍영천씨(84)의 인상적인 건배사입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유쾌하면서도 왠지 꼭 지켜야 할 것 같은 유언을 듣게 된 아들 주변에 앉았던 회원들은 장난기 어린 표정과 몸짓으로 박수 갈채를 보냅니다. 덕분에 회원들은 물론, 축하하기 위해 귀빈으로 온 손님들조차 10년 후의 100주년을 생각하면서 흥겹게 축하연회를 즐겼습니다.

 

22년 전 벌초 때 “저기가 내가 들어갈 묫자리야”라고 말했던 정씨 할머니 앞에서 손자가 벌초를 하고 있다. © 사진=이인자 제공

 

할머니 유언에 제주도에 ‘생장’

 

‘유언’이란 말에 저는 갑자기 22년 전 생각이 났습니다. 처음 고내리 출신 재일동포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인연이 홍씨 집안 조상 묘 벌초와 그때 만난 맏며느리였던 정씨 할머니의 유언이었습니다. 재일동포 묘제에 관한 연구를 하던 저는 제주도 출신 동포들이 매년 추석 전에 벌초를 하러 고향에 간다는 걸 알고 다른 연구자 소개로 고내리 홍씨 집안 벌초를 취재했습니다. 그게 22년 전의 일입니다.

 

“저기가 내가 들어갈 묫자리야. 난 일본에 살고 있지만 화장이 싫어서 죽어도 화장하지 말고 생장(生葬)으로 고향에 묻어 달라고 했어. 그게 내 유언이지. 이번 고향 방문이 마지막이지 싶어 손자 데리고 조카들 따라왔지.”

당시 92세였던 정씨 할머니는 묘지 턱에 앉아 저에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생장이란 제주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로, 외국에서 죽어 화장한 뼈로 돌아오지 않고 주검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른다는 말입니다.

 

정씨 할머니의 남편은 일찍 돌아가셨고 1남4녀의 자녀 중 아들마저 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났기에 고향에 묻히고 싶은 염원을 받아줄 가까운 사람은 작은집 조카 홍연원씨(당시 55세)였습니다. 도쿄 아라카와(荒川)구에 살고 있던 연원씨는 큰어머니의 유언을 잘 지키기 위해 그때까지 고향을 찾지 않던 할머니의 손자며 그에게는 조카인 형욱씨(당시 32세)까지 데리고 와 벌초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말도 잘 못하고 문화도 잘 모르지만 삼촌들 말씀을 그저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할머니가 생장을 소망하시니 어떻게라도 이루게 하기 위해서지요.”

한국말로 소통하지 못하던 형욱씨는 저에게 일본말로 말을 건네왔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마을 친척들과 환경에 둘러싸여 뙤약볕 밑에서 넓고 넓은 가족 공동묘지의 벌초는 힘겹게 보이기까지 했지만, 할머니를 안심시키겠다는 듯이 열심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그들과 인연이 돼 교토에서 학교를 다니며 살고 있던 저는 도쿄 아라카와 미카와시마(三河島)에도 거처를 마련해 필드웍을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돌아와 얼마 안 돼 병원에 입원하시고 다음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사이 미카와시마에 모여 사는 고내리친목회 분들의 이주에 관한 조사를 해 그들이 어떻게 이주했으며 어떻게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 시점에서 저는 할머니의 유언대로 생장이 이뤄지는 장례에 참석하게 됐지요.

 

 

조국과 고향 찾고 가꿀 수 있게 해 준 계기

 

21년 전 제주에서는 밖에서 죽은 죽음을 객사라고 해 마을 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미리 마련된 해변 어귀에 텐트를 치고 그곳을 장례식장으로 삼았습니다. 5일장을 치른 후에 할머니는 유언대로 남편 옆 그리고 아들보다 한 단 위의 묫자리에 묻히셨습니다. 상주였던 손자 형욱씨는 일본인 부인과 연년생으로, 두 살과 한 살의 아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는 벌초 때보다 더 힘들어 보였습니다.

 

“장례 절차가 일본과 너무 달라 놀랐습니다. 상주인 나도 자고 싶은데 마을 사람들이 화투를 하면서 밤을 함께 보내주고 가끔 졸린 내 눈을 보곤 쉬라고 몰래 방으로 데려다주는 친척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기에 몇 개 아는 단어와 몸짓, 눈짓으로 서로 소통하면서 지냈던 시간들이 지금 생각하면 소중했어요.”

1년 뒤의 형욱씨 말입니다. 장례식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형욱씨는 매월 1일과 15일에 할머니가 살던 미카와시마 아파트에서 한국에서도 드문 삭망제를 지냈습니다. 고모들과 삼촌들의 지시를 받는 제사였지만 1년간 변함없이 제사를 지내고 탈상을 합니다. 그 후 매년 어김없이 1년에 한 번은 부모님의 고향을 찾아 친척과 함께 묘지를 손질하고 있지요.

 

‘유언’이라는 말에 이끌려 긴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머니의 유언은 의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형욱씨에게 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잊고 살 수도 있었던 ‘조국’과 ‘고향’을 찾고 가꿀 수 있게 해 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또한 매년 벌초로 만나는 조상의 묘지는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뿌리와 고향을 설명 없이 느끼게 해 주는 장치가 됐습니다. 정씨 할머니 외에도 생장으로 고내리에 돌아오신 분은 다섯 분이 계십니다. 생장으로 아버지를 고향에 모신 40대 의사 아들의 말입니다.

 

“‘내가 죽으면 날 화장하지 말고 시체로 고향에 가져가 조상님 옆에 묻어주길 바란다. 그게 내 유언’이라는 말을 아버지가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너무 놀라고 기뻤습니다. 일생을 일본에서 가장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생활을 마다 않고 살아낸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소망을 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물마저 흘리면서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멋대로 자손을 힘들게 하는 듯한 그 유언이 저의 유일한 위안이 됐습니다. 살아내기 어려운 이 일본에서 자식을 위해 죽은 듯이 참고 살던 아버지가 자신만을 위한 바람을 한 번이지만 우리에게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요즘 ‘유언’이라 하면 남기는 사람도, 그걸 받게 되는 사람도 재산 처리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유언들은 재산을 나눠 받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 살아가는 자손들을 풍요로운 미래로 이끌어주는 유산을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홍영천씨는 자신은 물론 아들과 친목회 모두에게 10년 후의 1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꿈을 품게 해 줬고, 정씨 할머니는 손자에게 고향을 남기고, 의사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국에서의 고생스러움만을 남기지 않고 품위 있게 마감한 것 같은 위안을 안겨줬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접하는 ‘유언’은 어떤 것들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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