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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惡은 평범하다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14(Tue) 14:39:33 | 14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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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며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살해한 총책 아이히만이 머리에 뿔 달린 악마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이더라는 것. 그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자각이 없었고, 보편에 비춰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 다른 말로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무능한 사람이더라는 것 때문이다. 흔히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번역되곤 하는 ‘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이 탄생한 경위다.

 

그런데 이때 ‘생각하는 능력이 없는 무능함’이란 말은 조금 조심해서 다뤄야 할 개념이다. 이는 바보 같다거나 말 그대로 뭘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위에서 시켰으니까”, 또는 “남들도 다 그러니까” 같은 변명 뒤에 숨어서 매일매일 저지르는 크고 작은 악행에 둔감해질 때, 악은 평범해진다. 모든 사회적 통념을 정말 그러한가라는 질문으로 바꿔보지 않는 하루하루가 흘러갈 때, 악은 평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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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 사내 성폭력 사건을 필두로 직장 내 성폭력 문제가 다시 거론되고 있다. 성폭력은 조두순 같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라 ‘멀쩡한 보통남자들’이 훨씬 더 많이 저지른다는 점을 우린 알려 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남성 중심적 성문화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짓이 바로 성폭력이란 것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폭력 남성은 평범하다. 유대인은 악하고 독일인은 선하니까 유대인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다른 독일인들도 다 하는’ 사고에 물들 때, 차별당하는 여성의 입장에 무지할 때, 그래서 유혹당해서 강간을 한 것이므로 여성이 꽃뱀이라는 평범한 생각을 ‘다른 남자들처럼’ 뜻 없이 내뱉을 때, 악은 평범해진다.

 

성찰하려 하지 않을 때 가장 단순한 해법은 ‘폭로하고’ ‘법대로’ 하는 것이다. SNS에 폭로되고 경찰수사를 받게 되는 상황은 두려움을 주고, 아주 작은 생각의 계기를 만든다. 그래서 공론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수많은 잠재적 가해자들이 자신 안의 가해자성을 인식하고 성찰할 때까지, 떠들어야 한다. 왜 많은 남자들은 ‘강간범’을 욕하면서도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바로 너, 바로 당신의 그 안이함이 범죄의 시작이다. 그래서 악은 도처에 평범하게 널려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저질러진 범죄를 처벌하는 바로 그 법을 집행하는 남자들이 평범할 때, 예컨대 여중생과 “결혼을 전제로 연인 관계를 이어왔다”는 주장의 실제를 성찰하는 능력에 무능할 때,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가를 고통받은 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일에 무능할 때, ‘법’조차도 악의 평범성에 물든다. 법원, 검찰, 경찰이, 성폭력의 성격과 양상에 무지할 때, 그들은 무능해진다. 평범한 악행을 저지른다. 그러면 악은 평범을 넘어서 잔혹해진다.

 

꼭 전쟁 같은 시기에만 아이히만들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 데나, 그야말로 “세상 도처(到處)에 유(有)아이히만”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한국 사회가 여성들에겐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직전의 유대인들의 게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너무 평범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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