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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은발에 장총 든 여전사도 결국 ‘엄마’였다

모성(母性)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 누아르 영화는 진정 불가능한가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1.18(Sat) 17:30:00 | 14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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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은 오랜만에 등장한 여성 중심 영화다. 그것도 누아르를 표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단 반가운 시도다. 범죄조직을 재계 유력 기업으로 키운 2인자, 그를 사랑하는 해결사, 이들에게 발목 잡힌 검사까지 세 사람의 욕망이 얽혀드는 잔혹하고 슬픈 이야기가 90분간 펼쳐진다. 이 영화는 주인공 ‘현정’의 파격적인 외양에 더해 배우 김혜수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정통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는 것으로도 주목받은 작품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현정의 캐릭터는 예상에서 조금 빗나가 있다. 이는 최근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여성 중심 누아르·액션이 보여준 어떤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만하다.

 

 

강렬한 이미지의 여성 캐릭터, 그러나…

 

사실 누아르의 공식은 단출하다. 세력 내 권력 다툼이 기본 얼개다. 조직의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자와 전복하려는 자가 충돌한다. 누군가는 죽고, 그를 죽인 다른 자는 살아남는다. 《미옥》도 이 공식을 따른다. 그러나 짐작과 달리 이 행동의 주체는 현정(김혜수)이 아니다. 그럼 현정의 캐릭터는 극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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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에서 현정은 조직의 2인자이자 김 회장(최무성)의 비서다. 즉 그녀는 전달받은 임무를 실수 없이 마무리하는 것을 최우선해 움직이는 인물이다. 애초에 현정이 조직을 오래전부터 수사해 온 검사 대식(이희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그의 약점을 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이것이 현정의 자발적 선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건 대식의 등장으로 가장 큰 자극을 받는 인물이 상훈(이선균)이라는 점이다. 그는 조직의 해결사인 동시에 오래도록 현정을 흠모해 온 인물이다. 상훈은 그에게 접근한 대식으로부터 김 회장과 현정의 관계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전해 듣고, 이후 폭주하듯 조직을 장악하려 든다. 조직의 충성스러운 개처럼 살았지만 인정받지 못해 비뚤어진 상훈의 욕망은 모두의 파멸을 부른다.

 

때문에 현정은 상황을 주도하는 인물이라기보다 상훈과 대식에 의해 펼쳐진 상황에 반응하는 인물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머지않은 미래에 조직에서 은퇴하고 평범한 삶을 누리려 했던 그녀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나선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아쉬움은 바로 이 같은 설정에서 비롯된다. 현정에게 소중한 것은 권력이나 명예가 아니다. 현정에게는 과거 김 회장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 이제 갓 외국에서 돌아온 아들 주환(김민석)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며, 김 회장을 지키지 못한 현정은 주환이라도 지키려 한다. 《미옥》을 연출한 이안규 감독은 “현정이 자신을 린치한 검사를 수조에 가둬 놓고 권총을 쏘는 장면이 영화의 키(key) 이미지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가 현정을 활용하는 방식은 이와는 거리가 있다. 현정을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자 엄마로 위치시키는 순간, 영화의 결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후 현정의 행동들은 모성(母性)의 영역을 벗어난 그 무엇이 되기 어렵다.

 

영화의 제목인 ‘미옥’은 현정의 옛 이름이다. 누군가 그 이름에 대해 묻자 현정은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라 답한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이 영화는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느 시절에 발목 잡혀 있는 자의 고독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엄마이기 때문에 멈칫할 수밖에 없는 현정의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 은발에 장총을 든 여전사라는, 한국영화에 전례 없던 이미지를 내세웠던 《미옥》의 강렬함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모성이 여성 중심 서사에서 그다지 새롭거나 매력적이라고 할 만한 동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현정에게 다른 개인사가 존재할 순 없었던 걸까.

 

 

김혜수에만 의존하는 좁디좁은 여배우 풀 문제

 

그나마 분명한 반가움은 《미옥》이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다양하게 시도되지 않는 여성 중심 누아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영화계에서는 남성 캐릭터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던 액션 누아르 장르와 여성 중심 서사를 결합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다. 《미옥》에서도 강렬한 액션 장면들이 꽤 등장하지만, 액션 장르가 주는 본연의 쾌감은 올해 6월 개봉한 김옥빈 주연의 《악녀》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 주인공 1인칭 시점의 무자비한 살육이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는 무엇에 방점을 찍었는지를 분명히 한다. 오로지 ‘여성 액션’이라는 키워드에만 집중한 듯한 《악녀》는 액션의 배치를 먼저 고려한 후 그 사이를 이을 이야기의 배치를 고려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만큼 드라마는 상투적이며, 캐릭터는 입체감 없이 평평하다는 지적으로부터 마냥 자유롭긴 어렵다는 분명한 한계 역시 지닌다.

 

누아르의 주인공을 단지 여성으로 바꾸는 시도만으로도 일단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차이나타운》(2015)이 보여준다. 이 영화는 흥미롭게도 조직 간 알력 다툼과 돈 흐름의 중심에 여성 캐릭터를 놓는다. 극 중 인물들은 조직을 이끄는 보스 마우희(김혜수)를 ‘엄마’라 부른다. 여기에서 엄마는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다음 세대에게 생존의 법칙을 계승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스토리와 주인공을 내세운 《미옥》과 《악녀》, 그리고 《차이나타운》을 공통적으로 연결하는 키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모성이다. 《악녀》의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거칠게 설명하자면, 사랑에 배신당했다는 사실과 딸을 잃은 슬픔으로 인해 폭주하는 인물에 다름 아니다. 《차이나타운》은 어떤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엄마라는 단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서 모성 신화를 해체하고 전복하려던 이 영화는 결말에 다다르면 스스로 다시 모성 신화로 귀결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조직을 차지한 일영(김고은)은 과거 엄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뜻이 ‘내 아이입니다’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엄마가 자신을 입양하려 했음을 증명하는 입양 서류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장면들로 인해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만큼은 중층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엄마라는 단어는 다시 가족 구성원이자 희생하는 존재에 머무르고 만다.

 

여성 중심 누아르로 기획된 《미옥》과 《차이나타운》의 주연 배우가 모두 김혜수였다는 사실은 좁디좁은 여배우 캐스팅 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 촬영 중인 박훈정 감독의 《마녀》는 기성 배우들과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결국 오디션을 통해 신인 배우를 섭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생체 실험을 통해 살인 병기로 길러진 여고생이 주인공인 영화다. 모성에 얽매이지 않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구축, 여성 중심 누아르와 액션 장르 안에서 기꺼이 변신을 꾀할 여배우들을 찾으려는 시도가 한국영화계에는 필요하다. 변화의 시도는 반갑지만 안팎으로 바뀌어 나가야 할 것들은 여전히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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