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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에서 시작해 문화의 장소 거듭난 강원도 양구

[김지나의 문화로 도시읽기]

김지나 도시문화칼럼니스트(서울대 도시조경계획 연구실 연구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01(Fri) 14: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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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고성에서부터 파주까지 우리나라 최전방 지역을 횡단하는 대장정을 다녀왔다. 강원도 양구는 그 여정 가운데 만난 작은 도시다. 양구와 인접해있는 고성, 인제, 화천, 춘천, 철원 모두 지역명물 한두 가지 정도는 금세 떠올릴 수 있었지만, 어쩐지 양구는 유독 생소했다. 양구에서 군 생활을 한 친구가 그곳에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한 모습의 거대한 분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을 뿐이었다. 한국전쟁 때의 한 외국 종군기자는 그 광경을 보고 화채그릇(punch bowl)을 연상해 ‘펀치볼’이란 별명을 지어 준 모양이었지만, 그런 귀여운 이름과는 달리 오늘의 양구는 북한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살벌하고도 외로운 군사지역이란 인상이 강했다.

 

때문에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을 찾은 것은 예기치 않게, 그리고 매우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양구의 비무장지대와 펀치볼 분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을지전망대’로 가던 중 ‘박수근미술관’이란 표지판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때 처음 든 생각은 ‘양구에서 박수근미술관을 얼마나 잘 만들 수 있었을까?’라는 다소 삐딱한 의구심이었다. 지자체에서 지역연고의 예술인들을 소재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만드는 일은 흔하게 벌어지지만, 작품세계에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고 또 전문적인 시설운영을 이루어내기란 꽤나 어려운 과제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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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서 박수근미술관을 얼마나 잘 만들었겠어?”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안고 양구읍 정림리에 위치한 박수근미술관에 도착하니, 해 질녘의 어슴푸레한 하늘을 배경으로 화강암을 거칠게 쌓아올린 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벽이 만들어내는 좁은 길을 따라 미술관 안마당으로 돌아 들어가자 미술관 전체 건물이 마치 산자락에 묻혀 있는 듯한 풍경이 나타났다. 건물 안의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아까 들어왔던 입구와는 다른 높이의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길은 박수근 묘소로 이어진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오면 옛 시골풍경을 연상케 하는 푸른 들이 펼쳐지며 그 가운데 화가의 아틀리에를 콘셉트로 하는 ‘박수근파빌리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석양빛을 받아 실루엣만 어렴풋이 보이는 박수근파빌리온은 정말 박수근이 이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은 제1회 박수근미술상을 수상한 황재형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또 다른 건물에 아티스트 레지던스 시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박수근미술관은 단지 박수근의 작품을 전시하고 박수근을 추모하는 장소만은 아닌 듯했다.

 

박수근미술관은 방문객들이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박수근기념관’ 외에도 현대미술관과 창작스튜디오, 그리고 ‘박수근파빌리온’으로 구성돼 있다. 박수근기념관은 2002년에, 아티스트 레지던스를 비롯한 현대미술관은 2005년에, 그리고 박수근파빌리온은 2014년에 차례로 개관됐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필요로 했던 이 계획은 박수근기념관이 설계될 때부터 구상된 것이라 한다. 어떻게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처음의 의구심은 어느새 놀라움과 감탄으로 변해있었다.

 

박수근의 작품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단순하고 담담하게 담아낸다. 거친 질감이 대상에 대한 화가의 진솔한 시선을 느끼게 한다. 그 담백한 표현방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란 혼란의 시대를 온전히 겪어내고, 생전에 세상으로부터 인정조차 받지 못했지만 묵묵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완성했던 화가의 뚝심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박수근미술관을 설계한 故이종호 건축가는 그런 박수근의 생애와 그림, 그리고 미술관이 들어서게 될 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박수근미술관 건축의 과정을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나가는 것’이라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대지에 ‘새겨지는’ 건축이란 땅이 가진 질서를 보존하고 존중하는 것이며, 이것이 박수근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건축의 방식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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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박수근’ 완성 위해 민관 협력 주효

 

건축가의 시선은 건물 하나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이 일대의 풍경 자체가 박수근미술관을 완성하는 중요한 ‘수장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박수근의 명성이 대단하지만 기념관 하나만으로 큰 지역적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 것으로 예상했으며, 더 나아가 이곳이 계속해서 새로운 문화예술을 생산해나가는 창작의 터전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으로부터 시작됐으나 단지 그의 작품을 박제하는 공간이 아닌 살아있는 문화의 장소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유한 풍경 속에 미술관이 완전히 녹아들어 다른 지역에서 감히 흉내내지 못하는 양구만의 문화자산이 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는 양구군의 소신 있는 결정과 지원이 있었고, 공간이 완성된 이후 미술관의 작품을 채우는 일은 유족을 포함한 여러 기증자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포스트 박수근’을 일구어나간 기획력도 박수근미술관의 중요한 기반을 만들고 있었다. 박수근을 기리는 후배 작가들의 작품, 현대미술에 나타난 박수근의 영향에 대한 조명, 레지던스 입주작가들의 전시 등등, 다양한 기획전시를 통해서 이 공간은 살아있는 미술의 현장으로 재탄생하는 중이었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은 원석과도 같은 날것의 문화자원을 스스로 재생산되는 ‘자산’으로 가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문화예술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많은 지자체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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