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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던 탐정 영화의 쾌감, 《오리엔트 특급 살인》

웅장한 스케일, 화려한 액션물에 밀린 ‘탐정 영화’ 계보도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09(Sat) 16:00:01 | 14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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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과정과 범인의 정체는 미궁에 빠진 상태다. 범행 장소는 외부와 차단된 밀실. 이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자는, 풍부한 경험과 예리한 직관을 지닌 탐정뿐이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기차 안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짐작 가능하듯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가 1934년 출간한 동명 추리 소설이 원작이다. 영국 배우이자 감독인 케네스 브래너가 연출하고, 그 자신이 직접 주인공 탐정 에르큘 포와로를 연기했다. 미셸 파이퍼, 조니 뎁, 주디 덴치, 페넬로페 크루즈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도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던 영화다.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정통 탐정 영화의 부활을 꾀하는 시도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자타 공인 최고의 탐정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는 사건 의뢰를 받고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탑승한다. 이스탄불에서 런던까지 가는 여정 가운데 폭설로 열차가 멈춰 섰던 밤, 승객 라쳇(조니 뎁)이 살해당한다. 사건 전날 밤 라쳇은 포와로에게 “누군가에게 협박받고 있으니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포와로는 이를 거절한 바 있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밀실 살인 사건. 구미가 당긴 포와로는 각각의 알리바이를 지닌 13명의 용의자들을 대면하며 추리를 시작한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포와로는 서로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던 이 13명의 용의자가 과거 일어났던 하나의 비극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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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다시 부활한 탐정 에르큘 포와로

 

최근 탐정이 전면에 나섰던 영화가 얼른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이 정확하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영화 속 추리의 영역은 탐정이 아닌 FBI나 CIA 등의 조직으로 넘어갔다. 범죄의 규모가 더 이상 밀실 살인의 정도가 아니라 국제적 테러나 과학자의 폭주, 외계 침공의 범주 등으로 넓혀졌기 때문이다. 외모와 행동만 보고 상대의 직업과 성격을 파악하는 천재 탐정의 이야기는 애초에 딱히 유행으로 자리 잡았던 시기도 없을뿐더러 자연스레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1970년대 등장한 《더티 해리》 시리즈나 1980년대 말 등장한 《리썰 웨폰》과 《다이하드》 시리즈처럼 생활의 피로감으로 가득한, 마냥 정의롭지만은 않은 형사 캐릭터를 내세운 액션물의 인기도 탐정 영화 제작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데 한몫했다. 험프리 보가트가 탐정을 연기한 《말타의 매》(1941),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1974) 등과 비슷한 작품이 다시 등장하기는 아무래도 요원했다. 2000년대 들어 할리우드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주드 로가 각각 셜록 홈즈와 왓슨을 연기한 《셜록 홈즈》 1·2편을 내놓긴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차라리 ‘아이언맨의 탐정 버전’인 액션영화라고 평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사라졌던 탐정을 다시금 불러들인 계기는 영화가 아닌 TV 드라마다. 영국 BBC 방송국이 2010년 첫선을 보인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TV 시리즈 《셜록》이 전 세계에서 신드롬을 일으켰고, 이 작품은 극장판 《셜록: 유령신부》(2015)로까지 나왔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저작권 문제 해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품 기획을 5~6년 전부터 시작했음을 감안하면, 《셜록》의 메가 히트가 미친 영향이 아예 없다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기획 자체만으로 일단 반가운 프로젝트다. 물리의 법칙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액션의 기준이 된 오늘날, 이 영화에는 그 흔한 화려한 액션 시퀀스 하나 나오지 않는다. 대신 퍼즐 조각을 맞추는 듯한 추리 장르 특유의 지적인 전개, 흑과 백이 또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회색 지대에서 정의의 감각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고뇌, 날카로운 직관과 증거를 해석하는 명민함을 갖춘 탐정의 면모에 집중하게 만드는 고전적인 재미가 존재한다. 물론 세상을 ‘정의의 저울’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포와로가 탐정 인생 처음으로 논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는 선택을 내리는 과정, 사건의 슬픈 내막은 원작의 매력에 빚지고 있는 부분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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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걸음마 뗀 수준의 한국 탐정 영화

 

아시아에서는 탐정 영화의 어떤 경향을 찾아볼 수 없을까?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소년탐정 김정일》의 나라답게 일본은 유독 탐정 영화가 발달한 편이다. 대표적인 감독은 하야시 가이조. 그는 데뷔작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1986) 이후 탐정 영화만 찍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형식에 가깝고, 극 중 탐정이 수사하며 찾는 것은 놀랍게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같은 설정에서도 짐작 가능하듯 하야시는 일반적인 사건 해결의 과정보다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독특한 연출이 더 돋보이는 탐정 영화들을 주로 찍었다.

 

대중적으로 가장 호평받은 것은 탐정 하마 마이크 시리즈. 《내 인생 최악의 시간》(1994), 《아득히 먼 시대의 계단을》(1995), 《덫》(1996)까지 총 3부작이다. 이 시리즈에서 탐정 사무소는 독특하게도 극장 2층에 있다. 의뢰인이 사무소를 찾기 위해선 영화표를 먼저 사야 한다. 하야시의 영화는 1990년대 국내에 해적판으로 알려진 것이 더 많으며, 이따금씩 기획전 등을 통해 소개된 정도지만, 일본뿐 아니라 국내 감독들에게까지 그의 영화적 스타일이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야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일본탐정협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하며 학문적으로 접근하기까지 했는데, 이후 실제로 사립탐정으로 활동했다.

 

중국에는 실존인물 적인걸을 바탕으로 한 시리즈라도 존재하지만, 그런 인물도 딱히 찾을 수 없는 한국에서는 탐정 영화가 아직 갓 걸음마를 뗀 수준이다. 진중한 사건 해결을 중심에 놓기보다는 코믹 액션 장르의 소재로 탐정이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상업영화 최초로 탐정을 전면에 내세운 《그림자 살인》(2009) 이후 등장한 《조선명탐정》 시리즈가 지금껏 유일한 시리즈물이었다. 조금 다른 스타일의 탐정 영화라면 권상우와 성동일 주연의 《탐정》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시대극의 장치를 벗어나 ‘생활 밀착형 동네 탐정’을 콘셉트로 내세웠던 《탐정: 더 비기닝》(2015)의 속편이 내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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