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눈을 바꾼다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08 14:27
  • 호수 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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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페미니즘을 정치사상이라고 말하고, 페미니즘은 차별에 맞서는 도구라고도 말해 왔다. 이번엔 페미니즘이 ‘눈(안목)’을 바꾼다고 말하고 싶다. 안(眼)과 목(目)은 각각 보는 일을 하는 기관과 눈여겨보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래서 안목이라는 말은 눈썰미, 판단력, 좋은 취향 등을 가리키게 된다. 바로 이 ‘눈’, 즉 문제를 발견하고 치유해 나가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첫 번째 단계는, 페미니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이 말은 페미니즘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관습과 타성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 보이지 않던 온갖 폐단이 곳곳에 쌓여 있음이 보이게 된다. 이른바 적폐(積弊)다. 페미니즘의 눈으로 바라볼 때 가장 먼저, 가장 마지막까지 보게 되는 적폐가 바로 차별이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차별이 아니라 차별하는 사람과 차별받는 사람이, 적폐가 아니라 사람이 저지른 잘못이 있다. 페미니즘을 실천한다는 말의 의미는, ‘거기 사람이 있음을 보’는 일과 ‘사람이 있음을 보라고 말하는 일’이 아닐까. 심지어 차별하고 차별당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음을 깊이 성찰하는 일이 아닐까.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안에 차별이 있고, 그 차별로 말미암아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가난해서, 가방끈이 짧아서, 장애가 있어서, 피부색이 달라서, 특정 지역에 태어나서, 심지어 집이 없어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차별당하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이 중 성차별을 모든 차별 중에 가장 본질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가장 많은 인류를 가장 손쉬운 이유로 차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은 나와 다른 사람의 존엄을 인식하는 연습이다. 2017년 3월8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33회 한국여성대회 기념식’에 참석한 대선후보들. 왼쪽부터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안철수 국민의당, 심상정 정의당,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 시사저널 임준선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래서 차별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의미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아니라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고, 서로 다른 다양한 표지를 우열의 표지로 바꾸고, “내가 너보다 낫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지배할 수 있다” “나는 너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라는 데까지 나아가는 차별은, 심지어 혐오와 증오범죄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구조를 발견하고 차단하기 위한 개인적·사회적·정치적 노력이 바로 페미니즘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 또는 ‘젠더적 여성’만을 위한 사상일 수가 없다. 페미니즘은 내가 차별받아왔음을 알고 이를 거부함과 동시에, 나 또한 차별하는 구조의 일원으로 어떤 차별에는 동참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탈출하는 연습, 모든 사람이 법 앞에 뿐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고 대등하며, 제각기 다르게 존엄하다는 것을 실제로 인식하는 연습이니까.

 

최근 들어 페미니스트들을 향한 저주와 증오의 언어가 더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분노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스스로의 자존감을 세워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변화의 동력에 불과한 페미니즘을 변화의 목적으로 여겨 탈출구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변화의 와중에 생겨나는 작은 불편과 손해 본다는 착각을 못 이겨내고 그 화살을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쏘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부디 보는 눈을 바꾸자. 차별 없는 세상,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공동체를 향한 첫걸음은 너와 내가 존귀한 사람임을 바로 보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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