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자 10명 중 7명, 죽기 전 병원 방문한다
  • 노진섭·이민우 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18.01.18 09:50
  • 호수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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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 “동네 병·의원에서 우울증 잘 가려내 치료해야”

 

김이곤씨(가명·26)는 최근 답답함과 두통 등 신체적 건강 문제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가는 홀어머니와 사는 김씨는 항상 돈에 쪼들렸다. 대학은 장학금을 받아 다녔고 대학원도 대출금으로 어렵사리 졸업했다. 이후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취업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현실로 부닥쳤다. 한 달 전부터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죽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당했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낀 의사는 관련 약을 처방하고, 김씨를 자살예방센터에서 상담받도록 연결해 줬다. 환자 정보 보호를 위해 익명을 요구한 의사는 “이 환자는 우울증이 심해 자살을 실행할 의도가 있어 보인다. 자살 예방 상담과 함께 당장 우울증을 치료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 10명 중 7명은 죽기 전에 병·의원을 방문한다. 우울증 진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지럼증, 두통, 소화불량, 요통, 답답함, 피로와 같은 신체 증상 때문이다. 이런 흔한 증상으로 우울증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환자는 엉뚱하게도 두통약이나 소화제만 먹는다. 그 사이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정도로 우울증은 깊어진다.

 

이런 환자를 가려내야 자살을 막을 수 있다는 공감대를 가진 의사들이 모여 2017년 범의료자살예방연구회를 설립했다. 여기에 대한뇌전증학회, 대한개원내과의사회, 대한소아과학회, 대한가정의학회, 대한신경과의사회, 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 소속 의사들이 참여했다. 우울증을 진료하는 정신과 의사뿐만 아니라 모든 의사가 ‘우울증을 조기에 발견해 자살률을 낮추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 단체 회장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는 “우울증 환자는 부모·배우자·지인에게 내색하지 않고 혼자 속으로 앓다가 의사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속내를 털어놓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일반인이 많이 찾는 동네 내과나 가정의학과 의사들이 우울증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면 많은 자살을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시사저널

 

자살자의 80~90%는 우울증 환자

 

국내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통계청의 ‘2016년 사망 원인 통계’ 자료를 보면, 10~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40~50대 사망 원인도 암에 이어 자살이 2위다. 매년 평균 약 1만4000명이 목숨을 끊는다.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의 3배에 이르는 수치다.

 

자살과 관련성이 가장 높은 질환이 우울증이다. 자살자의 80~90%는 우울증 환자다. 그러나 국내 우울증 진료율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우울증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2012년 약 59만 명에서 2017년 약 64만 명으로 해마다 늘어났다. 홍승봉 교수는 “우울증 진료를 받은 사람은 전체의 10%도 안 된다. 드러나지 않은 우울증 환자는 10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질환이라는 것이 해부학적으로 증명됐다. 미국 워싱턴대 연구팀은 2003년 만성 우울증 환자의 해마 부피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 정도 더 작다고 ‘미국정신의학저널’에 발표했다. 해마는 뇌에서 기억과 학습에 관여하는 부위이며, 최근 연구에서는 이 부위가 기분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인수 이대목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울한 상태일 때의 뇌를 촬영해 보면 정상적인 뇌의 대사와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울증은 뇌의 신경전달물질(세로토닌, 일명 행복 호르몬)이 부족해 생기는 병이다. 이 물질이 감정을 관장하는 뇌 분위에 전달되지 않으면 사람은 우울한 기분을 느낀다. 또 사별, 실직, 힘든 대인관계, 업무 스트레스 등 다양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트레스 호르몬(코르티솔)이 분비된다. 코르티솔은 뇌 활동을 조절함으로써 스트레스 극복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코르티솔이 장기간 높은 농도로 유지되면 세로토닌이 적어 우울증이 생긴다. 이외에도 불안감을 높이는 물질(노르에피네프린)이나 의욕을 갖게 하는 물질(도파민)도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 이런 물질들이 균형을 이루지 않고 부정적인 기분이 들게 하는 물질이 많아질 때 우울증이 발생한다. 따라서 약을 투여해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맞추는 게 우울증의 약물치료다. 약물치료만으로도 우울증의 70%는 치료된다.

 

우울증을 방치하면 치매에 걸릴 수 있다. 특히 노인의 우울증은 일반인보다 치매로 갈 가능성이 2~3배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반대로 치매가 우울증을 부르기도 한다. 미국 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주로 밝은 연기로 많은 사람에게 웃음과 행복을 전했지만, 정작 자신은 2014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파킨슨병 초기 단계에서 우울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알츠하이머 치매의 3분의 1은 우울증으로 시작한다는 연구가 있다. 뇌의 신경세포가 죽는데, 기억이나 호르몬 관련 세포도 사멸하는 것이다. 반대로 치매 때문에 기억력이 떨어지고 생활의 폭도 좁아지면서 심리적 반응으로 우울증이 생긴다는 연구도 있다. 젊을 때 우울증을 경험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병원을 찾아야 할까. 이론적으로는 우울감과 절망감, 흥미나 쾌락의 현저한 저하, 식욕과 체중의 증가 또는 감소, 수면량의 증가나 감소, 신체적 초조 또는 활동 속도의 지체, 성욕의 상실이나 피로감, 부적절한 죄책감과 책임감, 무가치감, 집중력 저하 또는 우유부단함,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생각 등이 2주 이상 지속되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 특히 이런 증상으로 일상생활이 힘들면 즉시 치료받아야 한다.

 

이런 증상을 ‘기분 탓’ 또는 ‘의지가 약한 탓’으로 돌리고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우울증 치료법은 발전하고 있어도 정작 환자가 치료를 받지 않으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

 

© 시사저널·pixabay

 

우울증 판단 기준 ‘2주일 이상’

 

바다를 유독 좋아한 양서호씨(가명·30)는 6년 전 해경에 지원 입대했다. 워낙 활달한 성격이어서 대인관계가 좋은 그는 군 생활이 순탄할 것 같았다. 실제로 동료 병사들과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간부 한 명이 그를 괴롭혔다. 양씨는 매일 그 간부로부터 심한 욕설을 들었다. 가족, 지인, 동료들을 생각해 버티려 했지만, 그 간부의 언어폭력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우울증에 빠졌고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버텨야 한다’는 말만 들었다. 부대를 배치받은 지 두 달쯤 지난 크리스마스날 그는 선임병들과 팬케이크와 피자, 치킨을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러나 그 간부 생각에 즐거움도 싹 가셨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두 번이나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으나 칼날이 무뎌 목숨을 건졌다. 다음 날 그는 경찰병원으로 후송됐다. 한 달간 입원하면서 상담을 받았지만 큰 차도는 없었다. 결국, 양씨는 의가사(依家事) 제대했다. 제대한 뒤에도 우울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1년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전문의의 치료와 주변 사람의 위로로 지금은 거의 회복됐다. 그는 “아픈 기억이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의 소중함을 절실히 알게 됐고, 또 현재의 나를 있게 해 줬다”며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이 있다면,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병원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 전에 우울증을 빨리 알아챌 방법이 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기간’이다. 우울한 감정이 2주일 이상 지속되면 우울증을 의심해야 한다. 두 번째 단서는 증상의 ‘심각성’이다. 우울한 기분 때문에 먹고 자는 기본적 일상에 지장이 생기면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다. 이런 점을 알아도 병원을 찾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정신병 환자로 보는 주변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김기웅 교수는 “우울증 치료 비율이 낮은 것은 정신 장애라는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환각 같은 증세가 나타나면 의지로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병원을 찾지만, 대부분은 우울증 증세를 가볍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로 해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 그 기록 때문에 민간 건강보험 가입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점도 한 가지 이유다. 상당수 민간 건강보험 회사는 정신과 진료 사실이 확인되면 보험 가입을 거절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등이 이와 같은 차별 조항을 해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울증 등의 이유로 자살이 종종 발생하는 서울 마포대교 위에 설치된 ‘한 번만 더’ 동상. 황동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실의에 빠진 남자를 다른 남자가 볼을 꼬집으며 위로하고 있는 모습이다. © 시사저널 이종현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다

 

우울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우울한 기분이 드는 정도라면 수다, 여행, 취미, 운동, 술 등 개인의 취향대로 풀 수 있다. 그러나 우울증은 뇌 기능에 이상이 생긴 질환이므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로든 병원 방문이 여의치 않다면 일단 자신에게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상태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김인수 이대목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진다면 각 지역에 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정신과 전문요원과의 상담으로 병원치료가 필요한지를 확인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 우울증 환자를 둔 주변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병원에 가보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힘든 점을 잘 들어주고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결 방법을 얘기하게 된다. 김인수 교수는 “누구나 다 우울하다거나, 당신이 과민하다거나, 의지가 약해서라는 등의 발언은 우울한 사람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갖게 할 수 있다”며 “우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사람이 평소와 다르게 우울한 상태인 것이 확실하다면 정신건강복지센터나 정신과를 찾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울증 예방의 필수항목은 규칙적인 신체리듬이다. 특히 수면이 중요하다. 수면과 기분은 각각의 사이클이 있는데 수면에 변화가 생기면 기분의 사이클도 깨진다. 기분의 사이클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깰 필요가 있다. 직장생활 등으로 자는 시간이 불규칙하다면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이라도 일정해야 한다. 또 운동이 우울증 예방과 재발 방지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를 통해 규명됐다. 스트레스나 분노를 운동으로 풀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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