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18 14:22
  • 호수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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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참사 9주기, 공권력과 인권의 끝나지 않은 싸움

 

2009년 1월20일 매섭게 추웠던 겨울날 새벽. 용산과 마주한 남일당 건물 옥상 망루에서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갖고 다른 꿈을 꾸며 매일매일 이 땅의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화염 속에 세상을 떠났다. 철거민은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망루에 올랐고, 경찰은 부당하고 위험한 명령이지만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컨테이너 박스에 몸을 싣고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둘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일 뿐이었다.

 

돈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해 왔던 대한민국 건설자본과 그 자본의 달콤함을 잘 아는 권력은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여섯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과거 속 수많은 사건들 중 하나로밖에는 기억되지 않겠지만, 2009년 겨울 새벽 용산의 ‘죽음’과 ‘죽임’은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기억이다.

 

2009년 12월31일 모든 신문과 뉴스 첫머리는 용산 참사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됐다는 소식이었다. 정치인들은 용산 참사 협상 타결에 자신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알리기 위해 분주했고, 남일당 참사 현장엔 100여 명의 기자가 북적이며 취재 열기를 달구었다. 협상내용을 추측하는 기사들이 인터넷을 채웠고, 한 보수신문은 결국 ‘돈’으로 해결됐다는 유치하고 악의적인 사설을 쓰기도 했다.

 

2009년 7월 서울 용산4구역에서 용산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가 진행됐다. © 시사저널 이종현

 

참사 당시 ‘연내 해결’ 집착한 서울시

 

나는 다섯 철거민들의 유족들과 용산4구역 철거민 23인으로부터 협상에 관한 모든 권한을 법률적으로 위임받은 협상대표였다. 1년 넘게 검은 상복을 입고 살았던 유가족들의 한(恨)과 눈물, 거리에서 노숙하며 생존권 투쟁으로 살아온 철거민들의 하루하루를 짊어지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용산에서 함께 분노하고 기도하던 사람들, 경찰의 방패와 군홧발에 차여 같이 쓰러지고 이유도 모른 채 경찰에 연행돼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어찌 ‘돈’을 이유로 1년간 장례조차 모시지 않고 싸울 수 있었겠는가.

 

정부의 책임 있는 사과가 가장 중요했고 철거민들 생계 대책인 임시상가와 임대상가 보장이 우선이었다. 물론 고인들과 철거민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협상의 중요한 쟁점이었지만, 앞의 두 조건에 비하면 협상에서 가장 먼저 합의점을 찾았던 것이 바로 ‘돈’이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서울시는 용산 참사 ‘연내 해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부 사과가 선행되지 않은 채 협상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보상금이 아무리 많아도 정부의 공식 사과가 없으면 협상은 없다고 수십 번을 확인했다. 시간이 촉박해진 서울시는 직접 국무총리실에 협조를 구하고 우리의 요구사항들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테니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자고 집요하게 연락을 해 왔다. 총리 사과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말을 담보로 그해 12월20일부터 총 여섯 번의 본협상이 진행됐다.

 

알려진 것처럼 마지막 협상은 12월29일 오후 4시부터 30일 오전 6시40분까지 저녁식사와 최종 합의문 검토를 위한 두 번의 정회를 제외하곤 쉼 없이 진행됐다. 장례를 치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제시한 정부의 사과, 유족들에 대한 보상과 생계대책, 임시상가와 임대상가를 포함한 세입자들에 대한 보상에 합의하기까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긴장과 첨예한 대립의 시간들이 계속됐다. 우리는 총리 사과문에 ‘용산 참사’로 명기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총리실은 ‘용산 사고’ 또는 ‘용산 화재사건’이라 쓰겠다고 주장해 막판에 협상이 결렬될 위기가 오기도 했다. 결국 ‘용산 화재참사’로 합의하는 데 꼬박 하루가 더 걸렸다.

 

용산 참사 관련 협상 타결은 누구 한 사람의 공이 결코 아니다. 누구 한 사람이 해결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총리나 서울시장이 해결한 일은 더욱 아니다. 우리가 1년을 하루처럼 살아올 수 있었던 힘, 실타래처럼 꼬인 용산 참사 관련 협상을 해결한 것은 오직 ‘사람’의 힘이었다. 용산을 기억하고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 천막 치고 매일 기도하며 용산의 버팀목이 돼 줬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 기도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시 쓰고 그림 그리며 용산을 지키던 사람들, 초를 들고 꽃을 들고 쌀과 라면을 들고 김치와 과일을 들고 용산을 찾아오던 사람들, 그들의 힘으로 우리는 1년을 버텼고 결국 협상과 함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재개발 잔혹사’를 멈춰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염원이 협상 타결의 원동력이었다.

 

용산 참사 유가족들은 참사가 발생한 지 1년 가까이 지난 2009년 12월에야 장례를 치렀다. © 시사저널 이종현

 

용산 참사 진정한 해결 위해 용산 떠나다

 

우리는 장례를 치르고 용산을 떠났다. 우리가 용산을 떠난 것은 용산을 잊기 위함이 아니라 용산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용산 참사를 해결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용산 참사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과제를 마주하기 위한 출발이었다.

 

문재인 정부 첫 번째 특별사면에 용산 참사 관련 철거민 25명이 포함되자 다시 한 번 용산 참사가 화제가 됐다. 하지만 이미 재판은 7년 전에 끝났고, 철거민들은 5년 전에 감옥에서 나왔다. 특별사면으로 철거민들이 받은 실질적 혜택은 아무것도 없지만 9주기 추모행사와 용산 참사로 옥살이를 하고 평생 남을 장애를 가지게 된 철거민들의 현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의 개봉을 조금 더 알리는 계기는 된 것 같다. 이번 사면으로 감옥에서 나온 용산 참사 관련 철거민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어떤 기자의 어이없는 질문은 세상이 용산 참사를 얼마나 기억에서 지웠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 줬다.

 

용산 참사는 단순히 자본과 세입자 간의 대결이 아니라, 집을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으로 만들어버린 건설자본과 쫓겨나는 이들의 편에 선 양심의 대결이었다. 국가공권력과 철거민들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을 힘으로 눌러 통제하고 억압하는 부당한 공권력과 내 삶의 터전을 지키겠다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집회·시위·표현의 자유를 위해 맞선 인권의 싸움이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나 간첩조작 사건들처럼 오랜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 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는 것이 쫓겨나고 내몰리다 결국 희생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용산 참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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