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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블랙리스트'…법원 불신만 더 키워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 결과로 후폭풍 휩싸인 법원

유지만·조해수 기자 ㅣ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8.01.29(Mon) 09:30:01 | 14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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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가 ‘신뢰의 위기’에 빠졌다. 많은 의혹이 제기됐던 ‘법원 블랙리스트’에 대한 부실한 조사 결과 때문이다. 법원 조사위원회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발표했지만, 조사 내용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준다는 지적이 많다. 당장 의혹의 중심에 있던 법원행정처장이 교체됐고, 재조사나 국정감사를 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법원이 또 한 번의 위기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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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닌’ 판사 블랙리스트


불난 데 기름을 끼얹었다.”

 

1월22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조사를 벌여온 법원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를 두고 나온 말이다. 이날 위원회는 지난해 11월20일부터 64일간 진행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론은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사 내용을 곱씹어보면 정반대 결론에 도달한다. 추가조사위 발표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사법 불신에 대한 대응’ 등을 이유로 공식적·비공식적 방법을 동원해 법원 운영과 법관의 업무뿐만 아니라 그 이외 영역에 관해서도 광범위하게 정보를 수집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구체적으로는 판사회의 의장 경선 및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추천 과정에서 각종 ‘대책’ 강구, 법원 내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학회의 소모임 ‘인권을 사랑하는 판사들의 모임(인사모)’ 학술대회 개최를 둘러싼 동향 파악, 대법원장의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들에 대한 동향 파악 등을 다룬 문건이 나왔다.

 

특히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형사재판을 맡은 담당 재판부에 대한 동향 파악 등의 문건도 작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 문건은 행정처 기획 제1심의관 사용 컴퓨터 저장매체 중 ‘기조실’ 폴더 안에 저장돼 있던 파일로, 원 전 원장의 항소심 선고일인 2015년 2월9일 다음 날에 작성됐다. 문건에는 해당 사건의 항소심 판결 선고 이전에 담당 재판부 동향을 파악한 경위와 내용, 판결 선고 이후 외부의 여론 동향과 더불어 법원 내·외부의 온라인 공간에서 판사들이 판결의 평가 내지 감상을 게시한 글과 댓글의 내용까지 기재됐다.

 

또 항소심 판결 선고 이전에는 BH(청와대로 추정)의 문의에 대해 우회적·간접적으로 항소심 담당 재판부 동향을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을 알렸고, 항소심 판결 선고 이후에는 사법부 입장을 외부기관(청와대로 추정)에 상세히 설명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추가조사위는 “사법행정권이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재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할 우려도 있는 사안”이라고 분석했다.

 

 

추가조사 결과 발표에 반발 커져

 

추가조사위원회의 발표가 나온 뒤 사법부 내에서조차 반발이 잇따랐다. 문건이 공개된 다음 날인 1월23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소속 남인수 판사는 코트넷(법원 내부 게시판)에 ‘나오면 나오는 대로 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남 판사는 추가조사위가 공개한 문건에 대해 “정의의 최후 보루인 법원에서 나온 문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내용이 담겨 있어 매우 충격적이다. ‘정치적 고려 없이 단서(증거)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수사한다’는 검찰의 발표가 떠올랐다”며 사실상 검찰수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차성안 전주지법 군산지원 판사는 다음 날인 1월24일 코트넷에 ‘블랙리스트 개념 정의 논쟁의 시작’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자기부정에 가까운 자정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차 판사는 인사상 불이익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니 블랙리스트로 볼 수 없다며 사안의 심각성을 축소하는 주장에 대해 “문제 판사로 찍히는 그 자체가 불이익”이라고 반박했다. 또 김동현 판사는 “제한된 범위에서의 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결과였다”며 “명백히 드러내 상응하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사법부에 더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반론이 제기된다는 것 자체가 법원 내부에서의 갈등이 만만치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울산지방법원 소속 김태규 부장판사는 코트넷에 “추가조사위가 영장주의 위배, 프라이버시 침해, 절차 위반 등을 정면으로 돌파해 가면서까지 이뤄낸 조사 결과는 ‘블랙리스트가 없다’로 귀결됐다”며 “무리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마음의 깊은 생채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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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대법원장 “참담…추속조치 취하겠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추가조사 결과 발표 이틀 뒤인 1월24일 입장문을 통해 후속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김 대법원장은 “국민들의 충격과 분노, 실망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사법부 구성원들도 커다란 충격과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며 “필요한 범위에서 조사 결과를 보완하고 공정한 관점에서 조치 방향을 논의해 제시할 수 있는 기구를 조속히 구성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법원 스스로의 힘으로 이번 사안이 여기까지 밝혀졌듯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저를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기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김 대법원장은 후속조치에 박차를 가했다. 가장 먼저 ‘인사조치’가 행해졌다. 그는 입장문 발표 다음 날인 1월25일 김소영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사의를 받아들여, 2월1일자로 안철상 대법관(사법연수원 15기)을 후임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했다.

 

표면상으로는 김 처장의 사의 표명이었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사실상 경질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블랙리스트 의혹의 중심부인 법원행정처장 교체를 통해 ‘인적 쇄신’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김 처장은 법원 블랙리스트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 뒤 김 대법원장에게 대법원 재판 업무로 복귀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법원장이 사퇴를 요구했다는 일각의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 법원행정처가 법관 사찰 등 의혹의 핵심으로 지목됐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컴퓨터를 추가조사위에 제출하는 것을 거부한 점 등이 처장 교체의 배경이라는 분석이 대다수다. 대법원 내부에서조차 “신임 안 처장이 추가조사 결과에 따른 후속 조처를 맡아 진행하는 것이 적정하다는 취지로 인사가 이루어진 것 같다”는 얘기가 나온다.

 

2차 추가조사도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김 대법원장은 1월24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판사 블랙리스트가 법관의 독립을 침해했다고 명백히 밝혔다. 그는 “법관의 독립을 침해할 수 있는 이러한 일로 국민의 사법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권위를 지탱하겠느냐”고 지적했다. 다만 방법론에 대해서는 신중했다.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보다는 법원 내에서 추가조사위의 조사 결과를 보완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추가조사위가 법원행정처의 반발로 임종헌 전 차장의 컴퓨터와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760여 개 파일을 조사하지 못해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 데 대해 별도 기구를 구성해 2차 추가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조사 범위와 방식은 별도 기구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일선 판사들은 일련의 사태에 대한 별도의 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수원지법과 의정부지법 등은 이미 판사회의를 소집했다. 각급 법원의 판사회의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의견을 모은 뒤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임시회의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일선 판사들이 느끼는 참담함은 그 어느 때보다 심할 것”이라며 “국민의 불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법원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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