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협’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주사파’
  • 이민우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5 17:49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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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출신 전향(轉向) 인사들 “주사파가 전대협 주도” 주장

 

“주사파(主思派·주체사상파)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 장악한 청와대의 면면과 실력답다. 전대협 강령 전문에는 미국에 반대하고, 회칙에는 ‘민족과 민중에 근거한 진보적 민주주의 구현’을 밝히고 있다. 지금 청와대에 들어간 전대협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이런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

 

지난해 11월, 국정감사 당시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의 이 같은 발언으로 여의도 정가(政街)는 때아닌 색깔 논쟁에 휩싸였다. 동시에 역사 속에서 희미해져가던 ‘전대협’이란 이름이 다시 각인됐다. 최근엔 영화 《1987》이 인기를 끌면서 전대협 출신 인사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전대협은 한때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학생조직이었다.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오를 정도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해체 이후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역사 속으로 잊혀져가고 있었다.

 

전대협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숙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전대협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도 만만치 않다. 여전히 전대협 주류 세력에 대해 ‘주사파’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주사파는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추구하는 세력을 의미한다. 실제로 전향(轉向)한 전대협 출신 인사들이 이 같은 비판에 직접 나서면서 논란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1992년 5월13일 건국대에서 열린 전대협 행사에 인공기가 걸렸다. © 사진=연합뉴스

 

“전대협 출신, 생각 변했는지 답해야”

 

문재인 대통령 취임일인 지난해 5월10일, 임종석 비서실장의 이름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이날 ‘주사파’라는 단어도 검색어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전대협 3기 의장 출신으로, 전대협의 상징적 인물과도 같은 임 비서실장에게 붙는 ‘주사파’라는 꼬리표. 그에게 각인된 주홍글씨는 “전대협 주류 세력이 여전히 주사파였다”는 시각에서 비롯됐다.

 

이 같은 여론 인식을 주도한 것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였다. 1991년 7월26일 안기부는 전대협에 대해 “북한의 대남 심리 공작 기구로서 구국의 소리 방송을 운영하는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의 지침을 추종하는 이른바 조통(조국통일) 그룹 등 주사파 지하조직의 배후 조종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주사파 지하조직들이 전대협 정책위원회에 지령을 내렸으며, 전대협 정책위는 다시 전대협 중앙위원회를 통해 투쟁방향을 주도해 왔다는 내용이다. 이후 ‘전대협=주사파’라는 공격은 주로 보수진영에서 이뤄졌다. 임수경 전 의원(당시 한국외국어대 학생)의 방북 사건이나 한총련의 이적 활동 등이 주요 논거로 활용됐다.

 

특히 전대협 간부로 활동했다가 전향한 인사들의 입을 통해 확산됐다.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맡았던 이동호 캠페인전략연구소장은 자신의 저서 《문제는 정치야 바보야》에서 “1985년 말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이전까지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는 운동의 지도사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하고 그 혁명노선을 학생운동에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985년까지 학생운동은 자생적 사회주의 혁명론자들이었으나, 이 시기부터 학생운동은 주사파가 장악하여 학생운동의 대세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과거 학생운동은 주요한 운동의 대상, 즉 주적이 독재정권과 그들의 물적 토대인 독점자본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들(주사파)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적은 미국, 다시 말해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있다고 본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인식이 오늘날 반미운동의 뿌리를 형성하고 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386 핵심 운동권의 사고방식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반미청년회나 조국통일 그룹, 관악자주파 등 세 그룹은 자파 출신을 총학생회장에 당선시키거나 활동가를 전대협 내부에 침투시켜 자신들의 지도를 관철시켜왔다”며 “전대협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그룹에 의해서 지도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노선과 자료 등 곳곳에 주체사상과 투쟁노선이 나타나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진영에서도 주사파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전대협 마지막 의장이었던 김종식씨 역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김씨는 “(주체사상은) 87년 이후 폐기되거나 폐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 속에서 재정립됐어야 한다고 본다”며 “북한의 현실이 객관화되고 상식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는 다 보이는데 그것에 아직까지 집착하고 정당에서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에 대해서도 “비대중적 운동을 계속했던 한총련 후배들을 보면서 참 안타까웠다”며 “학생조직도 다 내주고 대중성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 그 사상 하나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과거엔 주사파 맞다…현재는 글쎄”

 

물론 진보-보수 진영을 막론한 전대협 출신 인사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전대협 내에 주사파 그룹이 실존했던 것은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전대협 구성을 보면,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조직으로 보기 어렵다. 전대협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이한열 열사의 장례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전국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회의를 가졌다가 만들어졌다. 이들은 여러 개의 조직이던 학생운동단체를 통합한 상징적 조직이었던 셈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인 NL(민족해방)계열이 많았지만, PD(민중민주)계열도 어엿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NL은 반미와 통일운동에 주력한 반면, PD는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에 주력하는 입장이었다. PD계열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한 인사는 “총학생회에서 일한 건 맞지만 전대협으로 묶여 불리는 것은 다소 불편하다”며 “전대협이 그렇게 단일한 노선으로 구성돼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NL계열도 전부 주사파는 아니었다”며 “그들(주사파 활동가 그룹)이 다수를 차지한 것은 맞지만 전대협 출신을 모두 주사파로 보는 것은 무리”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종북(從北) 세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하태경 바른정당 의원도 “NL그룹 내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충성 여부에 따라 주사 NL과 비(非)주사 NL로 나뉘었다”며 “나는 비주사 NL에 속했다”고 소개했다. 하 의원은 “‘전대협 주류 세력이 주사파였다’는 표현은 맞지만, 그렇다고 전대협 출신들이 현재도 모두 주사파라고 볼 수는 없다”며 “주사파 문제를 털고 가지 못한 운동권의 원죄”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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