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Insight] 돈줄 마른 북한 사회 ‘고난의 행군’ 또 시작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2.27 10:18
  • 호수 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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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선전지 ‘노동신문’ 60만 부에서 20만 부로 축소 발행

 

북한군 관련 동향을 담당하는 한·미 정보 당국자들은 최근 몇 달간 포착된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동계훈련이 한창이어야 할 시기에 북한 전후방 부대에 걸쳐 별다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위성촬영 등 대북감시망을 통한 첩보 등을 분석해 보면 예년보다 동원 병력이나 장비 등 훈련 규모가 줄어든 게 확연히 나타난다는 군 당국의 판단이다. 한 관계자는 “특히 미그기를 주축으로 한 북한 공군 전투기들의 소티(sortie·출격 횟수를 의미하는 군 용어)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판단은 미군 당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월29일자 보도에서 “북한군의 동계훈련 규모가 예년보다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고 미 관리와 전문가를 인용해 보도했다. 보통 12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동계훈련을 실시하는데, 이번의 경우 시기도 늦게 시작한 데다 훈련 규모도 줄어든 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WSJ는 김정은의 군 관련 행보가 줄어든 점도 지적했다.

 

실제 통일부가 분석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공개 활동은 군부대 방문 등이 거의 없고, 국가과학원과 제약공장·교원대학 등 민간시설에 치중됐다. 특히 1월 한 달간 김정은이 군부대를 방문하거나 군 관련 통치행보를 벌인 건 한 차례도 없다. 2월에도 2·8 건군절 군사퍼레이드 외엔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건군 70주(周)를 맞았다며 분위기를 띄우면서도 군부대 방문을 자제하고 훈련 규모도 줄였다는 건 특이한 일”이라고 진단했다. 김정은은 지난해엔 탱크와 장갑차 보병연대의 동계 도하(渡河) 훈련을 참관하는 등 활동을 펼쳤다.

 

최근 북한은 체제 선전지 역할을 하는 노동신문 발행부수를 60만 부에서 20만 부로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이 2017년 4월14일 평양의 한 지하철역에서 노동신문을 보고 있다. © 사진=EPA연합

 

유류 봉쇄로 동계 군사훈련 대폭 축소

 

김정은의 군 관련 활동이 부쩍 줄고 동계훈련이 위축된 분위기를 보이는 걸 두고 한·미 당국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북제재의 약발이 본격적으로 먹혀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특히 항공유를 포함한 대북 유류지원 축소 등이 공군기 출격 훈련 등에 직격탄이 됐다는 진단이다. 유엔 안보리는 정유제품과 원유의 대북 수출을 연간 각각 50만 배럴, 400만 배럴로 제한하는 결의(2397호)를 채택해 강도 높게 시행 중이다.

 

대북제재의 불똥은 북한이 절대 성역으로 여기다시피 해 온 노동당의 선전·선동사업에도 튀었다. 최근 60만 부 정도 찍던 신문 부수를 20만 부 수준으로 크게 줄인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탈북단체를 포함한 대북 소식통들은 올 들어 노동신문 발행부수를 대폭 줄이고 개별 가정에 보급하던 물량은 거의 없앴다고 전한다. 정부 당국자는 “해외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신문용지 조달에 압박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며 “노동신문에까지 손을 댄 건 북한에 대량 아사 사태가 발생했던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처음으로 보여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군사훈련과 노동신문 발행 축소 사태는 북한 정권 입장에서 보면 심각한 사안이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군사 우선주의 노선을 걸어온 김정은 체제가 외부의 압박 요인에 의해 훈련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점에서다. ‘혁명의 선전·선동 참모부’라고 주장해 온 노동당의 기관지 노동신문에 손을 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노동신문은 단순한 뉴스 전달이 아니라 북한 체제의 주축인 300만 노동당원을 교양하고 동원토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이 이 같은 고육책을 취할 수밖에 없는 건 그물망 같은 촘촘한 제재가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유엔 주도로 국제사회는 교역과 금융 분야에서 대북제재를 펼쳤다. 하지만 중국 등이 미온적 태도를 취한 데다 동남아·유럽연합(EU) 등을 통한 거래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던 게 사실이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선 2012년 이후 사정이 확 달라졌다. 잇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미사일 도발에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국제사회가 김정은 체제를 압박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를 취했다. 무엇보다 김정은의 핵 도발 노선에 불쾌감을 갖고 있는 중국의 유엔 제재 참여가 결정타였다. 미 재무부는 지난해 10월 북한 유조선 예성강 1호가 해상에서 몰래 다른 선박으로부터 원유를 옮겨 싣는 장면을 포착한 위성사진을 공개하는 등 북한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대북제재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북한은 지난해 9월 ‘제재 피해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민생문제를 거론하는 등 방어에 나섰다. “어떤 제재에도 끄떡없다”던 입장에서 태도를 바꾼 건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문제는 대북제재와 압박의 파고가 더 거칠어질 것이란 점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월21일 국회 외통위 보고에서 평창동계올림픽 폐막 이후 미국의 제재 강화 움직임에 대해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이미 ‘포괄적 해상차단’(Maritime Interdiction)을 포함한 초강력 대북제재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EU도 평창올림픽이 끝난 후 강력한 대북제재를 동맹국과 함께 이행할 것이란 입장을 밝힌 상태다.

 

김정은이 올 신년사를 통해 도발에서 평화공세 쪽으로 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여동생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도 대북 압박의 여파로 보인다. 더 이상 도발행보를 벌였다가는 경제제재를 주축으로 한 압박을 견뎌내기 힘든 데다, 자칫 트럼프 행정부에 대북 군사타격의 빌미까지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가 북한 선적 유조선이 해상에서 타국 선박과 ‘환적(換積)’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장면을 포착했다며 관련 사진을 2월20일 공개했다. © 사진=뉴시스

 

국제사회 압박에 경제난…지도층도 불안

 

올림픽을 무대로 한 대남 유화책에 집중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물밑으로는 미국과의 대화를 모색하는 점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북한은 극도로 조심하는 형국이다. 자칫 제재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국제적으로는 물론 내부 통치에도 치명적일 수 있다. 김여정 특사가 문재인 정부의 주선으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과의 비공개 만남을 시도하다 막판에 포기한 것도 아직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채비가 부족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북한은 올림픽 이후 북·미 간 본격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남북대화 진전을 통해 대북제재의 틈을 벌리고, 한·미 공조를 흔드는 쪽에 주력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대북 압박의 격랑 속에서 ‘올리브 가지’를 흔들고 나온 김정은의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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