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사단의 김정은 미팅 ‘252분’…그 시간동안 무슨 일이?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2 13:26
  • 호수 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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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리틀 로켓맨’ 화제로 올려…오디오 빠진 채 화면만 소개 돼

 

“오늘 저녁 곧바로 뵙는 걸로 일정이 잡혔습니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미처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특사단장인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안도했다. 함께 방북한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천해성 통일부 차관 등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잘 풀려나가겠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로 방북한 남측 인사 5인방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면담과 만찬이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3월5일 오후 3시30분을 조금 넘긴 시간, 평양 대동강변의 고방산초대소. 순안비행장에서 내려 숙소에 여장을 푼 특사단 일행은 곧바로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전부장과 만났다. 평양 체류 일정과 논의 내용을 조율하기 위한 실무협의 성격이었다. 15분간의 짧은 접촉 모두 부분에서 김영철은 특사단과 김정은의 만남이 오후 6시로 잡혔음을 알렸다. 김정은 면담이 특사가 도착한 당일 잡히고 일정 통보도 즉각 이뤄진 건 이례적이었다.

 

북한을 방문한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왼쪽)가 3월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고 악수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특사단 짐 풀자마자 곧장 김정은 만나

 

앞서 특사 방북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체류 일정 마지막 날 오찬을 잡거나 전날 밤 만나는 수법을 써 남측의 애를 태웠다. 2005년 6월 방북한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3박4일 일정을 마치던 날 겨우 면담했다. 2003년 1월 임동원 특사 파견의 경우처럼 아예 만나주지 않고 빈손으로 귀환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이번 특사단의 경우 김정은 접견이 성사될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시점이나 장소·형식 등은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사단을 태운 검은색 메르세데스 벤츠 리무진 2대와 흰색 스타크래프트 밴이 들어선 곳은 평양 중구역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 김정은의 집무실과 연회시설이 들어선 우리의 청와대와 같은 장소다. 차에서 내린 일행은 접견장 앞에 서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김정은과 악수를 나눴다. 인민복 차림의 김정은 위원장은 환한 미소로 맞이하며 정의용 실장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김영철이 폐막식 대표단장으로 서울과 평창을 방문했을 때 동행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김정은 옆에서 남측 인사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자리를 안내하는 역할은 2월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에 맞춰 이뤄진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대남특사 방문 때 수행했던 김창선 서기실장이 맡았다.

 

정 실장 등 특사단 5인을 맞이한 김정은의 왼쪽엔 여동생인 김여정 제1부부장, 오른쪽엔 대남 총책이라 할 수 있는 김영철 통전부장이 자리 잡았다. 본격적인 면담이 시작되려는 분위기가 잡히자 정의용 실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특사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신임장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러자 김정은은 테이블 옆으로 몇 걸음 옮겨 정 실장과 마주 선 채 친서를 받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김정은 위원장은 테이블에 놓인 안경집에서 뿔테 안경을 꺼내 썼다. 그리고는 특사 단장인 정 실장의 발언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정 실장은 자신의 수첩을 꺼내 미리 준비해 온 이야기를 하나둘 꺼냈다. 가장 먼저 평창동계올림픽 문제가 테이블에 올랐다. 정 실장은 “평창에 고위급 대표단을 포함한 북측 인원을 파견해 성공적인 대회가 되도록 해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정은은 “한 핏줄을 나눈 겨레로서 동족의 경사를 같이 기뻐하고 도와주는 건 응당한 일”이라고 화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출발한 면담은 민감한 이슈가 거론되면서 다소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 실장은 “평창올림픽 때문에 연기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다시 미루거나 취소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강조했다. 또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이나 북·미 대화를 원한다면 더 이상 추가적인 도발, 특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발사체를 쏘아올리거나 핵실험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북 정상회담이나 남북관계의 진전은 비핵화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려면 미국과 북한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도 언급됐다. 정 실장은 이처럼 미리 준비해 간 4~5개의 의제와 관련한 설명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여러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A4용지 절반 크기의 메모장이 들려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지난 2월 북한으로 돌아간 특사단을 만났을 때 비핵화와 모라토리엄(핵과 미사일 도발 유예)은 물론 북·미 대화와 남북 간 문화 교류에 대해 우리 측 입장을 전달받았다”며 “김정은이 우리 특사단을 만나 이에 대한 견해를 밝힌 것으로, 문 대통령이 내준 숙제에 대해 답을 보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北, 4월말 남북 정상회담 고집해

 

4월말로 합의된 남북 정상회담도 마찬가지였다. 김여정 특사가 2월10일 청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평양 방문을 초청하자 문 대통령은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 측은 정상회담을 개최할 경우 6월 지방선거에 임박한 시점은 ‘북한 문제를 정치에 이용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 곤란하다는 방침이었다고 한다. 또 장소의 경우 평양은 물론 서울이나 판문점 등 어디든 좋다고 북한에 제안했다. 판문점의 경우 남북 양측 관할구역이 있는데 어느 곳이든 관계없고, 하루씩 번갈아가며 회담을 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이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집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3월7일 여야 5당 대표 초청 오찬에서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국외에서 따로 접촉한 건 없다”고 말했고, 정 실장은 “판문점에서 주로 이뤄졌다”고 부연했다. 대북부처 관계자는 “상당 부분 실무진들이 비공개 접촉을 통해 조율한 내용을 김정은 위원장이 최종적으로 답을 준 것으로 보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면담 시간 내내 김정은 위원장은 거침없이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보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리틀 로켓맨’이라고 비꼰 대목도 화제에 올려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정 실장이 준비해 간 발언을 제대로 끝내기도 전에 김정은 위원장이 입장을 피력하면서 남북 간 논의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3월6일 귀환한 특사단 일행이 발표한 6개 항의 ‘특사 방북 결과 언론발표문’이란 것이다.

 

한 시간 남짓한 면담을 마치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렀다. 특사 방북 소식을 전한 북한 관영매체들이 “최고영도자(김정은) 동지께서 남측 특사로부터 수뇌상봉(정상회담)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전해 들으시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만족한 합의를 보시었다”고 한 대목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이어진 만찬은 더욱 누그러진 상황 속에서 대화와 웃음이 오가는 자리였던 것으로 북한 TV가 공개한 동영상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회담 관계자는 “면담 자리에서 다소 굳은 표정의 장면도 있었지만 북한이 영상 편집 과정을 거쳐 밝은 분위기 속에 특사접견이 이뤄진 것으로 묘사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만찬장을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끈 건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였다. 연분홍색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리설주는 김정은과 함께 만찬장 입구에 서서 일행을 맞았다. 그녀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정원장 등에게 밝은 웃음을 보이며 인사말을 건넸다. 리설주가 대북특사 만찬장에 등장한 건 김정은 체제가 한국과 국제사회에 ‘정상 국가’로 비쳐지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란 해석이 나온다. 북한은 2월8일 군 창건일 기념 열병식 때 리설주를 처음으로 ‘여사’로 호칭했다. 이를 두고 4월말로 잡힌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로 등장시키기 위한 포석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북한을 방문 중인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 등 특사단이 3월5일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만찬에 앞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북측에서는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배석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제공


 

부인 리설주, 만찬 동석 ‘정상국가 이미지’ 연출

 

김여정 제1부부장의 만찬장 등장도 눈길을 끌었다. 김여정은 대남특사 때 안면을 익힌 정의용 실장과 서훈 원장 등에게 “우리 음식이 입에 맞으십니까”라고 묻는 등 친근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서훈 원장을 두고 양쪽에 앉은 시누이와 올케 사이인 김여정·리설주는 각각 ‘오빠의 최측근 보좌관’과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내조’ 역할을 분담해 수행하는 데 익숙한 모습이라는 게 대북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만찬 테이블에는 최고급 요리와 와인이 선을 보였다. 와인잔만 4개가 준비될 정도로 국빈급이었다는 얘기다. 북한식 인삼주인 수삼삼로라는 술도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첫 건배를 와인으로 한 이후에는 평양 소주로 이어갔다고 한다. 북한 TV가 공개한 영상에는 정의용 실장과 김정은·리설주 부부가 함께 소주가 담긴 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등장한다.

 

북한은 1박2일의 짧은 체류 기간에도 우리 특사단을 각별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이튿날인 6일에는 점심을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베풀었는데 메뉴는 옥류관 냉면이었다고 한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서울에 왔을 때 우리 측 인사가 ‘평양은 냉면이 최고라는데 맛보고 싶다’고 말한 걸 기억한 북측이 대동강변의 유명 음식점인 옥류관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방산초대소의 경우 특사단이 머무는 동안 한 층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남측 인사들을 감시하듯 안내원을 개인별로 배치하던 일도 이번에는 없었다. 특사단이 1층 커피숍을 가거나 뜰을 산책할 경우에도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숙소 TV는 KBS와 MBC 등 남한의 지상파 방송이 나왔고, CNN 등 서방 매체도 볼 수 있었다. 또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 네이버와 다음 등 국내 포털을 이용해 뉴스를 접하거나 메일 등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특사단이 김정은과 면담하고 만찬을 한 시간은 모두 4시간12분. 그 252분의 만남은 청와대가 브리핑한 내용 외에 대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북한 TV가 공개한 11분5초 분량의 기록영화에는 김정은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오디오가 빠진 채 화면만 드러나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기 어렵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관계가 꽤 진전된다 해도 상당 부분은 비밀에 부쳐질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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