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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가상(假想)’ 화폐, ‘군표’를 아십니까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호주머니 속 세상 - 군표의 추억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3(Tue)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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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상화폐가 화제다. 투기 열풍, 거래 규제에 대한 찬반 등으로 인해 과연 화폐로 인정해야 할지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화폐를 민간회사가 발행하고 관리한다는 점에 있다. 지금까지는 국가기관이 화폐를 발행해 왔다. 가상화폐처럼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민간화폐는 시장경제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당국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가 발행하지 않은 화폐로 ‘군표(軍票)’란 게 있다. 군표란 전시에 점령지나 주둔지에서 사용하는 군용수표이며, 식량 등 물자조달 비용, 현지인 노무비, 심지어 위안부의 급료에도 사용됐다. 군표는 주로 군에서 발행하며 나중에 국가기관에 제출해 현금으로 바꿔야하는 ‘임시화폐’다. 따라서 국가가 전복되거나 군이 패전하는 순간, ‘종잇조각’으로 변한다.

 

 

군표, 전시 점령지서 사용되는 ‘후불제 영수증’ 성격의 임시화폐

 

19세기말 독일·프랑스·러시아·일본 등 열강들은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앞 다퉈 군표를 발행했다. 자국 화폐는 전시에 운반하기가 어렵고, 대량으로 발행하면 본국에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열강들 중에서 일본이 군표 활용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일본 군표는 자신들이 침략한 지역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했다. 발행기관도 제각각이고 발행액수도 천차만별이었다. 무려 100가지가 넘을 정도였다. 게다가 전쟁 말기에는 일선부대에서 독자적으로 군표를 찍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나홀로’ 군표는 본국에서 발행여부 조차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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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렇다 보니 종전 후 일본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1975년 도쿄에서 열린 지폐 전시회장에서 한 할머니가 8장의 지폐를 매장 주인에게 내밀었다. 지폐 아래에 일본어로 대일본제국이라고 새겨져 있었고, 통화 단위는 러시아 글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때에 흔히 쓰이던 군표로 짐작한 주인은 헐값인 700엔에 사들였다. 영업이 끝난 후에 주변 업자나 전문가들에게 이 지폐를 보여 봤지만, 군표라고 추측만 할 뿐 어느 누구도 정체를 알지 못했다. 누가 어디서 얼마나 발행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소위 ‘듣보잡’ 지폐였다. 

 

그날 저녁에 경매가 열렸는데 700엔짜리가 무려 330만 엔에 낙찰됐다. 매장 주인은 불과 반나절 만에 횡재를 한 셈이었다. 이 지폐의 정체는 7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졌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과 전쟁을 앞두고 견본으로 극소량만 찍어낸 군표였다. 개전 후 불과 2주 만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실제 사용되지는 않은 ‘희귀종’이었던 것이다.

 

‘로또’가 아니라 ‘감옥행’ 티켓이 된 군표도 있었다. 2010년 10월 서울경찰청은 2차 세계대전 때 유통됐던 일본군 군표를 국내로 들여와 사기를 친 일당을 구속했다. 이들은 100페소권 군표 5만장을 지금도 필리핀에서 사용되는 돈이라고 속여 2억원을 가로챘다. 군표와 현지 화폐가 대체로 같은 통화 단위와 액면 금액을 쓰는 등 생김새가 비슷한 점을 노린 사건이었다. 이런 사기 사건은 전후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군표의 망령은 아직도 살아있는 모양이다.

 

군표는 합법을 가장한 수탈의 도구였다. 옛날 군대에서는 징발이나 약탈을 통해 부족한 물자를 마련했다. 이런 방식은 점령지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근대 이후에는 군표로 물자를 ‘구매’하는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돈으로 교환하는 시기와 방법, 환전 비율은 점령군 마음대로였다. 따라서 군표는 주민들이 약탈로 느끼지 않도록 ‘위장’한 지불수단일 뿐이었다.

 

군표는 경제적 침탈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 군부는 침략과 동시에 점령지에서 쓰이던 ‘적의 화폐’를 무효화하고 군표를 정식 화폐로 유통시키기도 했다. 점령지 정부의 숨통을 끊고 경제권을 일시에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코미디’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진주만 공습 바로 다음날인 1941년 12월8일 일본군은 홍콩을 급습했다. 연합군 정부의 화폐를 제조하는 공장을 접수해 자금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불과 열흘 만에 홍콩을 함락시킨 남방지역파견군의 오카다 요시카즈 정보참모는 화폐공장으로 알려진 상무인쇄관과 대동서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중국 교통은행의 5원권과 2원권 지폐용 원판을 손에 넣었으나 인쇄기는 이미 옮겨진 상태였다. 이어 구룡반도의 중화서국에 갔더니 일본에도 없는 최신식 활판인쇄기에서 중국 국민정부의 공식화폐인 법폐(法幣)를 찍어내고 있었다. 인쇄소 한켠에는 수백만 장의 법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오카다는 화폐전문가인 육군 참모본부의 야마모토 겐조우 중좌에게 연락을 취했고, 이들은 법적으로는 위조지폐지만 사실상 진짜인 지폐들을 시중에 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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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하자마자 ‘돈 맛’을 본 일본 남방파견군은 홍콩을 경제적으로 장악할 채비를 갖추었다. 점령 직후인 1942년 초부터 홍콩 달러를 군표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2005년 일본에서 발간된 《지폐수집사전》에 따르면, 군표 1엔당 2홍콩달러, 7월부터 1엔당 4홍콩달러 비율로 교환되었고, 이듬해 7윌24일부터는 달러 사용이 전면 금지됐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중국 본토에서 일본 군표가 흘러들어와 물가가 급등하게 되었다. 통화량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군표의 가치가 폭락했다. 다급해진 홍콩 주둔부대는 임시로 공장을 만들어 새로운 군표를 찍어냈다. 색상이나 디자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고, 위조방지 장치도 없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에는 위조 군표가 마구 돌아다니게 되었다.

 

 

위조된 ‘적의 군표’를 고쳐 사용한 기막힌 사건도 벌어져

 

이러한 상황에서 1944년 8월 전쟁 역사상 유례없는 ‘군표 공유(共有)’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군이 반쯤 완성한 채로 창고에 남겨둔 위조 군표를 홍콩에 진입한 영국군이 ‘재활용’ 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군표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항구에 정박된 잠수함에서 전기를 끌어와 일본 군표를 자신들의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대일본제국정부라고 표기된 부분에 붉은색 잉크로 선을 긋고, 영어로 1달러 홍콩 정부라고 임시로 표시해 유통시켰다. 같은 군표를, 그것도 위조 군표를 적군과 함께 사용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종전 후 이 사건이 불거지자 영국은 본토에서 파운드화를 공수해왔기 때문에 일본 군표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쳐서 사용한 흔적이 있는 현물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영국의 ‘낯 뜨거운’ 변명을 믿는 자는 별로 없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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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낳은 ‘기형 화폐’인 군표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점령지 주민들이었다. 일본군이 통치한 3년 남짓 동안에 홍콩달러, 일본 군사령부 군표와 중국 국민정부 화폐, 그리고 주둔군 자체 군표가 유통됐고, 심지어 위조 군표까지 성행했다. 군표를 교체하는 시기나 환전 비율도 일본군이 제멋대로 정했다. 속된 말로 ‘엿장수 맘대로’ 식의 통화정책이 반복되면서 주민들의 불안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투기와 암거래가 극성을 부렸고, 돈을 좀 버는가 싶더니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 앉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전쟁은 전선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장바구니와 호주머니 안에서도 벌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군표에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군표는 더 이상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악(惡)’이다. 전쟁을 부르기 때문이다. 첨단세상을 부르는 가상화폐도 ‘신의 한수’가 될지 아니면 군표처럼 사람들을 농락할지 모를 일이다. 호주머니 속 군표의 망령이 내 손 안의 스마트 폰으로 옮겨 오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탐욕은 변함이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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