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 갈등, 100년 지나면 그때서나 풀릴까?”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9 16:34
  • 호수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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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정부의 구상권 철회와 별도인 재판 ‘여럿’…주민들끼리 켜켜이 쌓인 감정도 ‘그대로’

 

앞바다에 넓게 깔린 바위는 강정마을의 쉼터였다. 날이 풀리면 바윗등에 모여 앉아 밥을 지어 나눴고, 여름이면 물에 뛰어든 아이들이 그 주위를 둘러쌌다. 동네 낚시꾼들은 바위 귀퉁이마다 터를 잡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민들은 해안가에 많은 구럼비 나무 이름을 따 바위도 ‘구럼비’라 불렀다. 구럼비 바위는 오랜 세월 강정주민의 땀을 식히고 마을의 대화를 흐르게 하는 자리였다.

 

2012년 3월7일 바위는 깨졌다. 주민들은 이날을 마을의 평화가 깨진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 전해 여름부터 바위는 높은 펜스로 둘러싸여 진작 누구의 접근도 불가능해졌다. 2007년 봄 강정에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된 후에도 무를 수 있으리라며 싸웠던 사람들은 펜스 위로 오가는 포클레인을 보며 조금씩 실감했다. 한참을 부수고 쓸어낸 빈 바위 터엔 그로부터 4년이 더 지난 2016년 2월26일 해군기지가 완성돼 세워졌다. 이제 마을에서 바위가 있던 방향을 쳐다보면, 바다 안으로 한참을 들어온 긴 해군기지가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4월26일, 평소와 다르게 사전 공고도 짧고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마을총회가 열렸어. 주민 1000여 명 중 87명만 참석했어. 총회 열리면 보통 90% 이상이 남자인데 이날은 이상하게 절반이 여자야. 정부와 해군이 사전에 집중적으로 로비한 해녀들이었지. 결국 이날 만장일치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 찬성 결정이 났어.”

 

2007년 8월부터 6년간 마을을 이끈 강동균 전 강정마을 회장은 기지 건설 결정부터 줄곧 불법·편법투성이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취임 후 곧장 새로 찬반 투표를 열었다. 주민 726명 중 반대가 640표 나왔다. 그런데 정부는 87명 만장일치 결과만 인정해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했다. 그렇게 시작된 공사는 내내 평화의 마을을 투쟁의 온상으로 얼룩지게 했다.

 

기지 건설 결정 그 후로 만 10년. 공권력 개입은 마을에 깊은 후유증과 갈등을 남겼다. 육지에서 온 수천 명의 경찰병력과 맞선 대가는 주민 및 활동가 700여 명 연행과 수억원의 벌금으로 남았다. 지난해 말 마을 주민들에 대한 정부의 구상권 소송 철회 결정과 별도로 아직 진행 중인 재판도 여럿이다. 강동균 전 마을 회장 역시 그동안 받은 재판 건수만 30건이 넘는다. 벌금도 3000만원에 달한다. 생계는 망가졌고 빚만 늘었다. 지금은 강정동 일대 1000평 남짓 땅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으며 다달이 이자만 갚고 있다.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발파 6주년인 3월7일 해군기지 입구에 구럼비를 그리워하는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깨져버린 마을, 그리고 10년

 

강정마을 반대대책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고권일 위원장 역시 기지 건설 초반, 마을 식당 등의 철거를 막았다는 이유로 시공사 하청업체로부터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됐다. 2013년 1심에서 벌금형을 받은 이후 항소심은 지금까지 5년간 미뤄지고 있다. 고 위원장 말에 따르면, 오히려 마을을 망가뜨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해도 모자랄 판에 벌금 수백, 수천만원을 물어온 것이다.

 

물리적 ‘투쟁’은 기지 완공 이후 마을에서 사라졌다. 정부의 구상권 소송 철회 후 마을은 얼핏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10년 쌓인 앙금은 조금도 덜어진 것 없이 그대로다. 좁은 길, 얇은 벽 하나 끼고 사는 가까운 이웃들은 지금도 남보다 못한 사이다. 찬반으로 극렬히 대립했던 이들끼린 지금도 서로의 경조사에 참석하지 않는다. 길을 가다 마주쳐도 여전히 쌩하기만 하다. 마을로 들어온 국가의 물밑 로비와 보상의 유혹, 오랜 충돌의 피로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주민들 사이도 돌이킬 수 없이 갈라졌다. 69년 강정 토박이인 은성마트 사장 김덕익씨는 “벌써 10년이 지나 세월이 약인 듯하지만, 막상 또 서로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담아뒀던 감정이 불쑥불쑥 나와 분위기가 싸늘해진다”고 말했다. “이곳 갈등은 100년이 더 지나도 풀릴까 말까 한 상태”라는 얘기도 마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들린다.

 

폭언이 오간 주민들 사이에 쌓인 고발과 벌금도 있다. 마을 길목에 자리 잡은 나들가게 주인 강희상씨는 마을에서 해군기지 찬성에 앞장섰던 인물 중 하나다.

 

“찬성 주민들 입장에선 어쨌든 우리가 승리한 거니까, 되도록 반대 주민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했어. 친동생도 반대쪽인데 그대로 뒀어 난. 그런데 반대하던 이웃 하나가 어느 날 내 딸들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거 아냐. 그래서 고발해 벌금 200만원 물게 했어. 그런 사람들한텐 몇 년이 지나도 화가 안 풀려.”

 

강씨는 잊고 덮으려는 주민들을 자꾸 자극하는 건 ‘이주자들’, 즉 강정 해군기지에 반대해 마을로 이주해 들어온 평화활동가라고 주장했다.

 

강정에 본격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되던 2011년 무렵, 전국의 평화활동가들이 일제히 강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들은 해군기지 건설을 막아서던 주민들의 목소리에 하나둘 힘을 보탰다. 문정현 신부가 꾸린 단체 ‘평화바람’을 비롯해 다양한 단체들이 마을의 반대 움직임에 활기를 넣었다. 활동가들의 결집에 언론도 더 이상 강정을 제주도만의 사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강정을 오가던 활동가들은 점차 하나둘 마을에 정착해 들어와 터를 이뤘다. 7년여가 지난 지금 여전히 20여 명의 활동가들이 ‘제주 도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강정마을을 거치는 올레길 7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길게 설치된 해군기지가 한눈에 보인다. © 시사저널 박은숙


 

어디에나 있는 문제, 어디에도 없는 싸움

 

제주에 산 지 5년째를 맞이한 평화활동가 최혜영씨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2011년 제주 4·3사건 기행으로 제주에 왔다가 강정을 들렀다. 1박2일 마을 방문 후 서울로 돌아갔지만 마음은 계속 강정에 남았다. 두 번 세 번 더 찾아오던 최씨는 2012년 3월7일 구럼비 바위 발파 현장을 경험했다. 그 후 서울에서 공사 소리만 들어도 트라우마처럼 강정이 떠올랐고 괴로웠다. 그렇게 제주 정착을 결심하고 내려온 그는 지난 5년, 매일 강정과 함께했다. “쟤네 왜 저리 고생하는지 모르겠다고, 이미 기지는 지어졌는데 뭐가 또 남아 이러고 있냐고 하는 주민들도 많다. 다 끝난 싸움이라 하는데 우린 정작 일상이 너무 바쁘다. 알려야 할 일도 많고 준비할 행사도 많다.”

 

최씨를 비롯한 상주 활동가들은 수년째 이어오는 매일의 일과가 있다. 활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인 문정현 신부의 미사와 100배 기도로 아침을 연다. 이어 해군기지 건설 반대가 적힌 노란 깃발을 둘러메고 해군기지 입구 구럼비 광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작은 스피커로 노래를 튼 채 30분 동안 율동과 짧은 행진을 이어간다. 한두 번 한 게 아니라 그런지 정해진 순서마다 헤매는 사람 하나 없다. 기지 입구를 지키는 군인들의 엄숙함과 달리 이들은 시종일관 밝고 흥겹다.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활동가들은 제주팀, 서귀포팀으로 나뉘어 거리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도 한다. 제주팀은 5년째, 서귀포팀은 5개월째 진행하고 있다. 한 활동가는 “제주는 4·3사건에 대한 트라우마가 대를 이어 집집마다 체화(體化)돼 있대. 한번은 우리 중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휘파람을 불었어. 그런데 주민한테 된통 혼이 났잖아. 4·3 땐 휘파람 불면 여기 사람이 숨어 있다는 뜻이었고, 그럼 바로 발각돼 죽는다는 거였거든. 이런 공포를 가진 주민들이 10년을 나라와 싸웠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야”라고 말했다. 바람이 불어 테이블 위에 깐 현수막이 연신 뒤집어지고 날아갔지만 계획된 2시간 동안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자가 강정마을을 방문한 나흘 가운데 셋째 날인 3월7일은 마침 구럼비 바위가 쪼개진 지 6년째 되는 날이었다. 활동가들은 전날 오후부터 마을 길목에 위치한 ‘평화센터’에 모여 행사에 사용할 현수막에 그림을 그렸다. 이들과 5년을 강정에서 함께해 온 대만 출신 활동가 에밀리는 “고향 대만에도 군사기지 문제가 심각하다”며 “이렇게 모두가 하나 돼 반(反)군사기지 평화운동을 벌이는 한국이 부럽고 새롭다”고 말했다. 군사기지 갈등은 없는 나라가 없지만 이처럼 꾸준하고 활발한 반대 운동을 유지하는 문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구럼비 바위 발파 6주년 행사에 함께한 활동가들이 평화의 씨앗 심기 퍼포먼스를 한 후 단체사진을 찍었다. © 사진=작가 이우기 제공


 

다 끝난 일이라고? 우린 하루하루 바쁘다

 

6주년 당일, 활동가들은 매일의 행사와 더불어 특별한 날을 기리는 별도의 순서들을 추가했다. 한 사람씩 발언자가 나와 10년의 싸움을 돌아보는 ‘기억증언’ 순서가 이어졌다. 한 발언자는 “오늘은 구럼비의 추억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아픈 날”이라며 강정주민 고영진씨의 시 《구럼비 바위》에 음을 더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또 다른 발언자는 “평소와 달리 오늘 이 주변에 경찰들이 와 우릴 감시하고 있다”며 경찰들을 책망하는 발언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 자리엔 이번 지방선거에서 일찍이 제주지사 출마를 선언한 녹색당 고은영 예비후보도 참석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고 예비후보는 “매년 활동가로 이 자리에 함께했는데 선거 후보로는 처음 자리에 나선다”며 “제주가 화약고가 아닌 평화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곳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어 활동가들은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심겠다’는 의미로 광장 옆 작은 텃밭에 콩을 심는 퍼포먼스도 진행했다.

 

구럼비 광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한 삼거리 식당으로 모인다. 스무 명 남짓이 둘러앉을 수 있는 크기로 천막을 개조해 만든 식당은 활동가들의 베이스캠프이자 힘의 원천이 되는 곳이다. 식당은 강정마을을 방문한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밥솥엔 항시 밥이 채워져 있다. 식사를 하러 온 활동가 말무덤(별명)은 “한창 활동가들 많을 때는 여기 식당 공간이 꽉꽉 찼고 쌀이나 김치 후원도 지금보다 훨씬 쌓였다”며 “활동가들에게 식사가 해결된다는 건 그 무엇보다 큰 힘이고 도움이다”고 말했다.

 

삼거리 식당 건물 옆 작은 컨테이너에 머물며 매일 식사를 준비하는 주민 ‘종환 삼촌’은 정부와 해군에 몇 번을 밀려나 지금 위치에 겨우 터를 잡았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강정에서 살았다는 그는 구럼비 바위 발파 전 바위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그가 지은 밥을 먹는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던 중 기지 건설이 시작되면서 식당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포클레인 아래로 몸을 집어넣고 무작정 버텨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쫓겨난 후에도 ‘조금 더, 조금 더’ 밀려난 그는 지금은 완공된 해군기지 근처에 난 작은 길 안쪽에 작게 자리 잡았다.

 

구럼비 바위 발파 6주년 행사날 종환 삼촌은 식당을 비웠다. 병원에 약을 타러 가기 위함이었다. “지난 몇 년 정신적으로 무참하게 짓밟혔어. 지금도 술을 안 먹으면 살 수가 없어. 불면증 때문에 잠도 잘 못 자고 사이렌 소리라도 어디서 울리면 남들보다 더 괴로워. 그래서 꾸준히 병원 가서 약을 타 먹고 있어.” 바위가 발파되던 그 무렵, 바위를 깰 화약 수송을 막기 위해, 마을회관은 새벽부터 사이렌을 울려 주민들과 활동가들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이날 화약 차량이 바위 근처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몸으로 차량을 막아섰다. 그날 그 사이렌의 기억은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수년간 매일 밥을 짓고 이들을 기다리는 종환 삼촌의 눈엔 해를 넘길수록 활동가들이 줄어가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 함께 팔짱을 끼며 이들과 기지 건설을 막았던 주민들은 상당수가 지쳐 체념한 상태다. 해군기지가 눈앞에 완성돼 있으니 이제 뭘 어쩌겠느냐는 거다.

 

70년 평생을 강정마을에 산 윤씨 할머니는 아침 산책 때마다 속상함에 해군기지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한다. 윤씨는 구럼비 바위 발파와 해군기지 건설 과정 내내 젊은 주민 누구보다도 강력한 반대 행동을 했다. 경찰에 연행돼 하루 꼬박 붙잡혀 있기도 했다. 윤씨는 “해군기지는 그때도 반대, 지금도 반대”라면서도 “이제 싸울 힘이 없고 같이 싸울 주민들도 없다”고 덧붙였다.

 

활동가들을 ‘외부 세력’ ‘시위꾼’이라 칭하며 극도의 반감을 표출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마을에서 낚시가게를 운영하는 80대 주민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을 세뇌시키고 마을을 어수선하게 했다”며 원색적으로 이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아침마다 미사를 드리고 음악을 틀며 해군기지로 향하는 이들이 일부 주민들에겐 눈엣가시처럼 보이는 것이다.

 

강정마을 평화활동가들은 매주 화요일 제주와 서귀포로 나뉘어 거리 서명운동을 진행한다. © 시사저널 박은숙


 

“투쟁 분위기 이젠 아냐” “지금부터 시작”

 

반대했던 주민들의 힘이 날로 빠져갈수록 마을에 머무는 활동가들의 걱정도 늘어간다. 게다가 지난해 말 새로 뽑힌 마을회장은 2007년부터 해군기지 반대에 앞장섰던 이전 두 회장들과 달리, 찬성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일부 주민들과 활동가들 사이에선 새 회장이 현재 마을회관 한 층에 마련돼 있는 활동가 숙소와 이들이 설치한 구럼비 광장 근처 천막들을 철수할 계획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어, 이들 사이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이에 대해 강희봉 신임 마을회장은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다. 향후 마을 운영계획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지금 내 말 한마디가 상대를 건드릴 수 있고 마을에 또다시 갈등 소지를 낳을 수 있다”며 “다음엔 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답변을 피했다.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여전히 마을 주민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음을 방증했다.

 

활동가들은 ‘해군기지가 완공된 지금, 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연일 찾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지금이 강정마을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기’라고 입을 모은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제주 성산읍에 건설 예정인 제2공항 문제다. 이들은 이곳에 공군기지가 들어와 섬 전체가 군사기지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기지 운용상 보통 해군기지가 있는 곳에 공군기지도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더불어 활동가들은 건설된 해군기지에 핵잠수함이 입항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이어갈 예정이다. 지난해 강정 해군기지로 외국함 10여 대가 들어왔고 11월엔 미국 핵잠수함도 입항한 바 있다. 배가 들어올 때마다 그 모습을 찍고 알리며, 음식물쓰레기 배출 등을 감시하고 있다. 3월말 제주 도의회에서 ‘핵잠수함 들어온 제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토론회도 열 예정이다. ‘어떻게 싸울지’ 고민했던 10년이 흐르고, 새로운 10년의 출발에 선 이들은 지금 ‘어떻게 강정에서 평화롭게 살지’ 매일 고민한다. 나날이 마을의 응원이 줄고 동지가 사라져도 이들은 전혀 무력하지 않다. 

 

강정 평화활동가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삼거리 식당 © 사진=작가 이우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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