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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항 안 했나” 한국식 성범죄 규정에 피해자 두 번 운다

강한 저항 없으면 암묵적 성관계 합의 인정…전문가들 “법이 현실 제대로 반영 못해”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ㅣ mw@sisajournal-e.com | 승인 2018.03.21(Wed) 15:00:00 | 1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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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미투 운동(Me Too)’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범죄 관련 소식이 날아들고 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피해 사실 폭로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모양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성폭력에 대한 애매한 ‘한국식 정의’가 성범죄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 법원에서 어떤 성관계가 성범죄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결정적 변수는 여성이 저항했는지 여부다. 성과 관련한 접촉이 이뤄지는 그 당시 시점에 여성이 강하게 거부하거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성범죄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법조계에선 이 같은 기준 자체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피해자가 물리적·사회적으로 거부할 수 있었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강하게 저항했는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난센스란 것이다.

 

판사 출신 오지원 변호사는 “성관계 시 여성의 동의 여부를 따질 때 현저히 강하게 저항 및 반항해야 강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여성이 겁에 질리거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조금이라도 호응하는 듯한 언행을 했다고 해서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현실을 반영치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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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제주지방법원은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필리핀 국적 처제 B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A씨는 결혼 3일 전, 거실에서 잠자던 처제 옆에 누워 신체 일부분을 만지고 잠에서 깨어 당황해하는 처제를 제압해 성관계를 가졌다. 이 사건에서 A씨가 주장한 무죄 근거 역시 처제의 ‘저항 여부’였다.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고 폭행이나 협박으로 피해자를 강간한 것이 아니란 주장이었다. 법원은 이 같은 A씨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폭행 없이 단지 피해자의 팔을 잡고 몸을 누르는 방법으로 피해자의 항거를 억압하고 강간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며 “(B씨가) 자신에게 닥친 절박한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판시했다.

 

이후 이주여성친족성폭력사건에따른공동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가족관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은폐하는 경향이 높다”며 “두려움과 충격에 빠진 상황에서 피해자는 어떤 행동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친족 간 성범죄를 경험한 여성들은 가족관계 등을 고려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숨기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뿐 아니라 수사기관들 역시 피해자의 저항 여부를 성범죄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2010년 5월 지적장애가 있는 만 13세 중학생을 4명의 고등학생이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피해자를 친구에게 소개해 함께 성폭행했다. 당시 경찰은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고 폭력이 없었다’며 불구속 수사를 한 바 있다. 피해 여성이 지적장애를 가졌다 해도 한국에선 강하게 저항의사를 밝혀야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인 유아무개씨(29)는 “성관계 당시 저항하지 않았다고 성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신체에 위협을 느껴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라는 이야기로 들린다”며 “성폭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현실성 없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형법 303조에 해당하는 ‘위력 및 위계에 의한 간음’의 경우는 강간죄보다 판단기준이 애매하다. 위력에 의한 간음은 업무·고용 등 사항에 대해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압박감을 느끼게 해 성관계를 하는 경우를 말한다. 물리적으로 상대방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하는 강간과는 다른 개념이다. 위력의 의한 간음은 보통 직장 등 조직에서 일어나는 성범죄의 일종인데, 이 경우에도 여성이 현저하게 강한 거부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면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직장인 윤아무개씨(29)는 “성희롱성 발언에 뭐라고 반응만 해도 무슨 성희롱이냐며 면박을 주고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게 사회 분위기”라며 “강한 저항의 유무로 죄를 따지는 것은 밥벌이를 걸고 목소리를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성범죄 여부를 따질 때 저항 정도를 따지는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영국·스웨덴 등 선진국에선 ‘명시적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성폭행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당시 얼마나 저항했는지가 아니라, 어느 정도로 적극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영국은 심지어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고 해도 강간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국제기구도 한국 사회 성범죄 규정에 개선 권고

 

한국의 애매한 성범죄 규정에 대해 국제기구도 나서 지적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3월12일 한국 정부에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2차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최종 권고했다. 피해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게 하고 강간을 폭행 및 협박이 있는 경우에만 적용하는 점을 문제 삼고, 여성의 동의 여부를 성범죄의 주요 판단 기준으로 삼을 것을 권고했다. 해당 위원회는 또 “여성의 폭로를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등 남성 중심적인 조직 문화에서 비롯된 행태가 모든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고 부연했다.

 

실제로 최근 한국에서 미투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네티즌들로부터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미투 운동 대상 남성들이 하나같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나서는 데다, 출처 불분명한 소문들까지 나돌면서 여성들의 2차 피해 우려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는 상황이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 미투 여성들이 2차 피해를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한국 사회에선 성범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직장 내 관계 등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여성이 싫다고 거부 의사를 표현해야만 한다”며 “이제 우리 사회와 법이 성범죄 여부를 따질 때 폭행·협박이나 저항 유무가 아닌 적극적 동의 여부를 따져야 하고, 이것이 곧 국제기구 권고사안”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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