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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타임 투 킬, 상상하십시오’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3(Fri) 11:00:00 | 14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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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아버지가 있다. 그의 딸은 불과 아홉 살. 심부름을 가던 길에 불량배를 만나 강간, 살해당한다. 그 아버지는 범인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곧 풀려나 거리를 활보할 것이라는 사실에 분노하여 직접 처벌을 한다. 그런데 이 소녀는 흑인이고 강간범들은 흑백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의 백인이다. 영화 《타임 투 킬》의 시작이다.

 

아버지의 청으로 변호를 하게 된 초보 변호사 브리갠스. 온 고을의 백인들이 똘똘 뭉치다시피 해서, 심지어 변호사의 가족에게까지 위해를 가하는 삼엄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클라이맥스인 최후변론이 다가온다. 이제 여러분이 배심원이라고 상상해 보라.

 

변호사 브리갠스는 편견과 배타심리로 완고한 마음을 지닌 백인 배심원들 앞에서 말한다. 그 직전 그는 자신이 불러온 증인의 ‘진정성’이 타격을 입어 매우 불리해진 상태였다. 순간적인 정신이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정신감정을 위해 출두한 의사가 예전에 강간죄로 복역한 일이 있다는 것이 검사에 의해 폭로된 것이다. 증인은 설명할 수 있다고 거듭 말했지만, 검사는 “예/아니요”로만 답하라고 다그치고, 결국 증인은 “예”라고 답한다. 이로써 브리갠스의 기획은 크게 차질을 빚는다.

 

변론을 시작하며 브리갠스는 배심원단에 사과한다. 자기도 의사가 전과가 있는 줄 몰랐노라고. 알고도 일부러 그랬겠느냐고. 그런데 그 의사는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 열아홉 살, 여자는 열일곱 살이었으며, 둘은 사랑하는 사이였고 남자가 출소한 뒤 결혼하여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그렇다면 의사는 법은 어겼어도(guilty) 죄(sin)는 없다고. 이 말은 배심원들을 흔들어놓는다. 보다 진정한 의미로 죄는 무엇이고 벌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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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그는 흑인 소녀가 당한 피해를 묘사한다.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의 심부름을 가는 길입니다. 날은 화창하고 꽃들이 즐겁게 반겨줍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소녀의 앞을 커다랗고 힘센 남자 두 사람이 가로막습니다. 그들은 소녀를 강간하고 온몸을 부러뜨려 나무에 매답니다. 소녀를 표적 삼아 맥주캔을 던집니다. 소녀가 죽은 듯이 늘어지자 그들은 나무에서 소녀를 풀어 다리 아래로 던집니다. 피에 젖고 정액과 오줌에 젖어 소녀는 버려집니다.”

 

눈을 감고 이 이야기를 듣던 몇몇 배심원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브리갠스는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말한다.

 

“자, 이제 그 소녀가 백인이라고 상상하십시오.”

 

배심원들은 눈을 번쩍 뜬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백인우월주의로 가득 차 완고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그 소녀가 백인이라고 상상하라는 브리갠스의 말이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킨 것이다. 흑인 아버지는, 살인에도 불구하고 무죄가 되었다. 배심원들이 같은 인간이자 부모로서 공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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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이 배심원이었다면 어떻게 평결하겠는가. 이 이야기를 극심한 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아내로 바꾼다면? 지금 이 순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성폭력 고발의 목소리가 불편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분들을 향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타임 투 킬, 상상하십시오. 그들의 고통을. 그리고 눈뜨십시오. 내 안의 완고한 인간을 이제는 죽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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