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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약탈, ‘군표의 잔혹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호주머니 속 세상 - 군표의 추억 2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前 KBS PD)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28(Wed) 1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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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필자는 태평양전쟁 당시 미얀마 독립군이 농촌마을에 배포했던 경고문을 본 적이 있다. ‘일본군이 식량을 살 때나 품삯으로 주는 군표는 잠시만 사용되는 위험한 돈이다. 악독한 군부는 군표를 강제로 사용하도록 비밀명령을 내렸으니 미얀마 민족은 절대 속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왜 ‘위험한 돈’일까? 궁금한 마음에 자료를 찾아보았다.

 

일본 대장성이 펴낸 ‘쇼와재정사(昭和財政史) 임시군사비’에는 군표를 전쟁비용으로 사용한 기록이 있었다. 중·일 전쟁부터 패전 때까지 7년 동안 발행된 군표 총액은 45억3500만 엔이었다. 현재 가치로는 대략 40조원이 넘는 액수라고 한다. 일선부대에서 독자적으로 찍어낸 군표를 제외하고도 이정도 규모였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군표는 미얀마·필리핀·홍콩 등지에서 그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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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농촌을 초토화시킨 ‘위험한 돈’ 군표

 

1944년 3월 미얀마 주둔 일본군이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는 임팔전투가 시작된다. 한데 전쟁에 꼭 필요한 보급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이미 태평양전쟁 전에 군의 자활(自活) 방침을 정해 놓았다. 부족한 물자는 각자 ‘알아서’ 조달하라고 미리 대못을 박은 것이다. 이 전투를 지휘하는 무타구치 렌야 중장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는 “전쟁물자란 원래 적에게서 빼앗는 것이야” “일본인은 초식민족인데 식량이 뭐 그리 걱정이냐.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라”는 ‘막장’ 발언을 일삼았다. 예전에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란 드라마에서 일본군으로 나오는 최재성이 굶주림에 지쳐 뱀을 뜯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속한 부대가 바로 무타구치 사령관이 이끄는 15군이었다. 

 

공격을 앞두고 무타구치는 “소와 말을 1만 마리 이상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축에게 짐을 나르게 하고 나중에 잡아먹는다는, 즉 보급과 식량을 동시에 해결하는 ‘칭기즈칸’ 전법에 따른 것이었다.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가축·식량, 심지어 농가의 밥그릇까지 닥치는 대로 징발했다. 이 때문에 인도와 가까운 미얀마 친주(州)와 마구엔주의 농촌은 초토화되었다. 

 

당시 미얀마에서 발행된 군표는 10루피권 1341만장, 5루피권 1565만장 등 2억6000만 루피 정도였다. 이 중에 많은 양이 임팔작전 때 사용됐다. 마구엔 출신인 아웅틴 툰(43)은 “지금도 고향 집에 그때 받은 군표가 남아있다.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릴 때, 군표 때문에 전 재산을 날려서 미쳐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마침내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한심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는 임팔전투가 시작됐다. 일본군은 소·말·양 4만여 마리에 짐을 잔뜩 싣고 인도로 진격했다. 하지만 적과 싸워보기도 전에 가축들이 강물에 빠져죽거나 포격 소리에 놀라 정글로 달아나는 사고가 계속됐다. 농민들을 ‘등쳐서’ 긁어모은 보급물자도 가축들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일본군 9만여 명 중 7만 명 이상이 대부분 굶어죽거나 풍토병으로 쓰러졌다. 불과 석 달 만에 일본군이 패퇴하면서, 미얀마 독립군이 경고한 ‘위험한 돈’은 현실이 됐다. 군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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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표의 폐해는 비단 돈 문제만이 아니었다. 때론 목숨을 담보하기도 했다. 일본은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공략을 앞두고 ‘남방개발금고’를 만들어 ‘군표전쟁’을 준비했다. 이 금고는 ‘대일본제국’이란 일본어와 ‘일본정부’라고 영문으로 표기된 은행권을 발행했다. 마치 본국 정부에서 발행한 정식 화폐처럼 포장된 이 돈은 군의 통제를 받는 사실상 군표였다. 

 

1898년 미군정이 시작된 후 필리핀의 경제 사정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300년이 넘는 스페인 식민시절에 비하면 그런대로 먹고 살만 했다. 하지만 1942년 1월 미군을 몰아낸 일본군이 적의 화폐를 금지시키고 군표를 대량 유통시키면서 필리핀 경제는 멈춰 섰다. 일본이 통치한 3년 남짓 동안 물가가 이전보다 무려 백배나 오를 정도였다. 

 

살인적인 물가폭등으로 군표의 가치도 뚝뚝 떨어졌다. 일본군은 가뜩이나 식량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에게 ‘종이’나 다름없는 군표를 던져주고 식량을 빼앗았다. 굶어죽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용케 살아남은 도시빈민과 농민들은 정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항일 게릴라가 되었고, 미군은 이들에게 무기와 식량을 대주었다. 

 

전후 미군과 필리핀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게릴라 수는 277개 단체의 26만715명이었다. 이들 중 사망자는 최대 11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게릴라 10명 중 4명은 밥과 목숨을 바꾼 셈이었다. 이처럼 일본이 벌인 ‘군표의 난(亂)’은 무력항쟁으로 이어져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가끔 전쟁터에서는 엉뚱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군표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자 사람들은 담배말이 종이나 카페 벽지로도 사용했다. 그러자 미군은 이를 선전전(宣傳戰)에 이용했다. 군표 뒷면에 붉은색 잉크로 ‘대동아공영권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구를 넣어서 필리핀 전역에 뿌렸다. 일본이 주장하는 대동아공영은 이 군표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고 일본의 배 만 불릴 뿐이란 뜻이었다. 일본의 ‘지폐·코인 자료관’에 따르면, 이 선전용 군표는 전후 해외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가 많아 꽤 비싼 값에 거래됐다고 한다. 잉크색이 약간 다르거나 선전 문구를 고무 스탬프로 찍어낸 ‘짝퉁 군표’가 돌아다니기도 했다. 이쯤 되면 어른들 전쟁도 동네 아이들의 전쟁 놀음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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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선 게릴라, 홍콩에선 스파이를 만든 군표의 잔혹사

 

중국에서는 유독 홍콩이 일본 군표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고 그 후유증도 오래 지속됐다. 군표가 정식 화폐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홍콩에는 19억 엔의 군표가 남아있었다. 중국 전체에서 유통된 군표 총액이 34억 엔 정도니까, 이 작은 섬의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쉽사리 짐작된다.

 

1968년 홍콩에서 군표 피해자 2900가구가 군표색상협회(軍票索償協會)를 만들었다. 이들은 일본정부에 5억5000만 엔의 보상금을 요구했다. 피해자 루페잉은 “남편이 은행에서 500 홍콩 달러를 바꾸다가 ‘적국의 화폐를 소지한 스파이’로 몰려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을 당하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면서 갖고 있던 155만 엔 정도의 군표라도 보상받기를 원했다. 

 

또 다른 피해자도 “그때 집 한 채 값이 8000달러 정도였는데 일본군이 강제로 군표를 쓰도록 해서 4000달러나 바꿨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들의 보상 요구를 거부했다. 1993년에도 홍콩의 군표 피해자 17명이 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하지만 일본 법원 역시 연합국이 일본의 전후책임을 면제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들어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일본은 1994년에 대만과 맺은 전후 배상협정에서도 군표 피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정부는 계속 발뺌하고 법원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의 행태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종이쪼가리를 건넸을 뿐 약탈과 다름없는 ‘군표의 잔혹사’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군표는 아시아 곳곳에 현물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피해자들도 아직 살아있다. 돌고 도는 게 돈이고 역사도 반복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미얀마 시골의 장롱 속이나 필리핀 카페의 소품 창고에 처박혀 있는 군표도 언젠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어 화려하게 컴백할지 모를 일이다. 필자가 이 ‘먹튀’ 화폐 여섯 장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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