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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젊은 여성 파워의 바로미터 《레이디 버드》

자신의 자전적 요소 들어간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의 활약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01(Sun) 16:00:00 | 14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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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4일(현지 시각) 열린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레타 거윅의 첫 단독 연출작 《레이디 버드》가 작품상과 감독상·각본상·여우주연상(시얼샤 로넌)·여우조연상(로리 멧칼프)까지 다섯 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결과적으로는 무관에 그쳤지만, 이 후보 지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거윅은 감독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역대 다섯 번째 여성 감독이다. 90회의 시상식이 열릴 동안 여성 감독은 고작 다섯 번 이름이 호명된 것이다. 할리우드의 재능 있는 여성 영화인들은 현재 어떻게 활약하며 자신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가. 거윅은 이를 알아보기 위한 최적의 바로미터다.

 

 

‘진짜 여성’의 이야기를 하다

 

《레이디 버드》는 거윅의 자전적 요소가 들어간 영화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크리스틴이라는 본명 대신 직접 지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요구하는 소녀(시얼샤 로넌). 거윅은 자신이 성장기를 보냈던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를 배경으로, 레이디 버드가 지긋지긋한 고향을 벗어나 뉴욕의 한 대학으로 떠난 직후까지의 이야기를 찍었다. 영화에는 대학에 간 레이디 버드가 고향을 묻는 한 친구에게 “샌프란시스코”라고 거짓 대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거윅이 각본을 쓸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이다. 영화는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느끼는 수치심으로부터 발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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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9·11 테러 이후 미국 전체에 공포와 무기력의 정서가 가득했던 시기다. 거윅이 미국 나이로 열여덟 살이 된 해였다. 자전적 요소가 있되, 인물들의 특징과 사건은 거윅의 과거와 꼭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고향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각, 학창 시절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에서 오는 감정들, 고향을 떠나는 정서는 거윅이 중요하게 여기고 묘사한 것들이다.

 

유머와 생기가 넘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인생의 중요한 시절을 통과하며 많은 ‘처음’을 경험한다. 이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여기에서 더욱 중요하게 묘사되는 건 엄마와 딸의 이야기, 그리고 처음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들이다. 딸을 사랑하지만 다소 억압적이고 사사건건 부딪히는 엄마와의 관계, 사소한 이유들로 멀어졌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를 반복하는 절친한 친구와의 사이, 나 아닌 이가 지닌 인생의 무게와 고민을 깨닫게 될 때의 감정 같은 것들이 이 영화에는 녹아 있다. 그러니까 《레이디 버드》는 온전한 여성 서사다. 불완전하고, 소녀에서 성인이 되는 길목을 통과했으며, 부정하고 미워했던 자기 자신의 뿌리를 비로소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진짜 여성’의 이야기.

 

이는 거윅이 ‘인디영화계의 연인’(Indie Darling)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천착한 주제다. 거윅은 배우로 먼저 경력을 시작했다. 대학원 진학이 지지부진하던 때, 친구가 멈블코어(Mumblecore·초저예산과 비전문 배우로 만든 영화. 즉흥 대사 등이 특징) 영화를 만든다며 배우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그렇게 출연한 영화가 조 스완버그 감독의 《LOL》(2006)이다. 이를 시작으로 거윅은 스완버그 감독과 함께 배우이자 작가 때론 공동 연출가 자격으로 몇 편의 작업을 더 이어가기 시작했다. 작가적 역량을 갖춘 거윅에게 멈블코어 장르는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였다.

 

상업영화에서는 배우로서 경력이 수월하게 풀리진 않았지만 마침내 《프란시스 하》(2012)가 찾아왔다. 이 영화에서 거윅은 뉴욕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그저 그런 스물일곱 살 무용수 프란시스의 삶을 연기하며 연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뉴욕 매거진은 “그레타 거윅은 삶의 투쟁조차 생생하고 재미있어 보이게 연기한다”고 평했다. 기획과 각본 단계부터 호흡을 맞춘 노아 바움백 감독과는 연인이자 파트너 사이로 발전했고, 이후 둘은 《미스트리스 아메리카》(2015) 등의 작업을 함께했다. 언론은 거윅을 ‘노아 바움백의 뮤즈’라 표현했으나, 거윅은 “그가 좋은 파트너이긴 하지만 창작에 있어서 (남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일갈한 바 있다. 이후 거윅은 《매기스 플랜》(2015), 《재키》(2016), 《우리의 20세기》(2016) 등을 통해 안정적 연기를 보여주면서 할리우드에서 단단히 자리매김했다.

 

타임지는 얼마 전 거윅을 표지 모델로 내세웠다. ‘라이트, 카메라, 액션(Light, Camera, Action)’이라는 제목 아래 ‘여성들은 어떻게 할리우드를 재연출(redirecting)하고 있는가’라는 심층 리포트를 다룬 호였다. 이는 거윅이 최근 할리우드의 여성 파워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라는 대표적 방증이다. 그가 각본을 쓰고 출연하며 10년 동안 남긴 25편의 작품은 인디영화 만들기의 교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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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화인의 새로운 롤모델

 

거윅은 영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순간들 중 하나로 2006년 사우스 웨스트 영화제(South by Southwest Film Festival)에서 만난 또래 여성 감독의 영화를 본 일을 꼽는다. ‘누가 이 젊은 여성에게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말해 준 걸까?’라는 궁금증은 곧 깨달음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많은 남자들이 하는 것처럼, 그 역시 그냥 영화를 찍은 것뿐이다.” 거윅의 말이다.

 

한때 거윅은 여성 우디 앨런에 비견되곤 했다. 앨런은 명실상부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아이콘 같은 감독이며, 거윅은 21세기에 그의 뒤를 가장 충실하게 이으려는 작가이자 배우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윅은 앨런의 영화 《로마 위드 러브》(2012)에 출연하기 전부터 앨런을 ‘숭배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앨런이 수양딸 딜런 패로우를 성추행했다는 주장이 나오자 거윅은 “미리 알았다면 앨런과 작업하지 않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히 밝혔다. 이후 패로우는 트위터를 통해 거윅의 용기 있는 지지 선언에 감사를 표했다.

 

영화 안팎에서 활발히 목소리를 내고, 더 많은 여성 서사를 이야기하는 여성 영화인의 활약은 중요하다. 2015년 발표된 TV 및 영화 속 여성 연구(Center for the Study of Women in Television and Film)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 감독의 영화에서 8% 수준의 참여도를 보인다. 반면 여성 감독과 제작자는 남성보다 여성을 핵심 역할에 고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타임지를 포함한 해외 매체들은 거윅이 단순히 연출을 꿈꾸는 소녀들을 위한 또 다른 역할 모델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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