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임신중단 광고 금지법’ 소송 큰 파문
  • 강성운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05 10:37
  • 호수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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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단’ 언급 “정보냐, 광고냐”…해묵은 낙태 논쟁, 언제 종지부 찍을까

 

독일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한 건의 소송이 해묵은 낙태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다. 크리스티나 해넬의 소송은 새로 출범한 독일 연방정부에 내분을 일으킬 정도로 큰 파급력을 보이고 있다. 임신중단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당사자인 여성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크리스티나 해넬은 독일 중서부의 소도시 기센의 개업의다. 올해로 37년 경력을 자랑하는 그녀의 전문 분야는 일반내과 및 응급의학이다. 해넬은 지난해 11월24일, 기센시 지방법원의 피고석에 섰다. 그녀의 죄명은 독일 형법 219a조 ‘임신의 중단에 관한 광고’ 조항 위반이었다.

 

해넬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여러 진료 과목 중 하나로 ‘임신중단’을 언급했다. 아울러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시술을 하며, 임신중단이 여성의 몸에 어떤 의학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관련법은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주는 문서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올렸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독일에서 여성의 임신중단은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여성은 임신 12주까진 의사와의 상담 후 합법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 13주부턴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 예컨대 산모의 생명이 위독하거나, 강간에 의해 원치 않게 임신한 경우, 또는 태아의 장애가 확인돼 예비 산모의 부담이 예상될 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다.

 

임신중단에 관한 광고 조항 위반 혐의로 소송 중인 독일 의사 크리스티나 해넬(왼쪽 세 번째)과 시민단체 사람들이 2017년 12월12일 독일 의회 앞에서 임신중단 관련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 사진=AP연합


 

임신중단 제한적 허용, 시술 광고는 위법

 

하지만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들도 정작 어느 병원에 가야 할지, 어떤 시술 방법이 있는지 의료적인 정보를 얻기 어렵다. ‘임신중단 시술을 광고하거나, 공적으로 제공해 이익을 취하면 안 된다’고 정해 둔 형법 219a 조항 때문이다. 이를 어길 경우 최대 징역 2년 혹은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임신중단 관련 정보는 정부가 허가한 여성 건강 관련 상담소에서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적절한 지원과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도눔 비태(donum vitae)는 임신중단을 원하는 여성에게 시술을 받을 수 있는 의료기관을 안내해 주지 않아 물의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궁지에 내몰린 여성은 정보의 진공상태에 빠지게 된다.

 

해넬은 임신중절을 고려하는 여성들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센주 검찰은 그녀가 영리를 목적으로 광고를 했다며 기소했다. 해넬의 변호인은 그녀가 낙태 시술에 대한 중립적인 정보를 제공했지, 낙태를 하도록 호소하는 광고를 한 게 아니라는 변론을 폈다. 하지만 판사는 “입법부는 임신중단이 ‘정상적인 일인 양’ 공적으로 논의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검찰의 기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벌금 6000유로(약 789만원)를 선고했다.

 

공판 전부터 전국적인 관심을 모은 이 소송은 판결 이후 독일 정치권의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해넬의 목소리는 독일 사회 곳곳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녀가 시작한 온라인 청원엔 단기간에 15만 명이 서명했다. 그녀는 지난해 12월 이 청원 결과를 독일 연방의회에 제출하면서 형법 219a조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촉구했다. 해넬은 슈피겔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가족 친화적인 사회를 만들고, 성 문제를 더 알리고, 성폭력을 막아야 한다. 낙태는 그래야 줄어들고,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률 전문가들도 이 법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한다. 울리케 렘케 하겐 통신대학 법학 교수는 차이트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형법 219a조는 오늘날의 자유로이 의사를 선택할 권리, 자기결정권, 평등권의 개념에 모순된다”며 “진작 폐지됐어야 하는 조항”이라고 평가했다. 진보 성향의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사설을 통해 현행법 아래선 의료인들이 여성에게 안전한 시술을 개발하고 전수받을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 신문은 이 때문에 1995년 임신중단이 합법화된 이후에도 의료적인 발전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올해 3월 새로 출범한 기독민주연합(CDU)과 사회민주당(SPD) 연합 정부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당초 형법 219a조 폐지를 주장하던 사민당이 개정안 마련으로 한 발짝 물러서면서 보수 성향의 기민련 정치인들과 낙태 반대론자들의 거센 공세가 시작됐다. 3월18일엔 기민련 소속 옌스 슈판 보건부 장관이 “여성들은 태아보다 동물의 생명에 더 관심을 보인다. 낙태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 생명에 대한 일이라는 것을 잊은 듯하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정치권이 유보적 태도를 보이는 사이, 의사와 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들은 혐오 선동의 타깃이 되고 있다. ‘생명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합법적으로 임신중단 수술을 하는 전국의 의사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고 병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해넬 역시 그녀를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고발하고 길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왔다.

 

 

논쟁 뜨겁지만 당사자 여성들은 ‘침묵’

 

해넬은 뉴스 사이트인 슈피겔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임신중단을 엄격히 규제하면 낙태가 감소하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는 낙태 반대자들의 의견은 ‘틀렸다’고 일축했다. 그녀는 “여러 연구들은 낙태를 엄격히 규제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낙태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음을 증명했다. 단지 임신중단이 훨씬 더 위험한 상황에서 이뤄질 뿐이다. 최악의 경우 여성이 죽는다. 즉, 스스로를 ‘생명의 수호자’라 부르며 임신중단 제한을 요구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영리를 목적으로 광고를 했다”는 판결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임신 중단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낙태 수술에는 보험수가가 낮게 책정돼 있고, 그래서 독일에서 시술하는 의사가 전국에도 몇 안 된다.”

 

한편 이 논의에서 임신중절을 고민하거나 경험한 당사자 여성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침묵은 역설적으로 당사자인 여성들이 지고 있는 고민과 고통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의료기관을 평가하는 독일의 한 사이트에는 해넬의 병원에서 임신중단 시술을 받았다는 한 여성의 후기가 올라와 있다. 이 여성은 “가장 가까운 소꿉친구조차 나와 연을 끊었다”며 임신중단 여성이 처하게 되는 사회적 고립을 증언했다. 그녀는 “다행히 우리는 이런 (임신중단 수술이라는) 출구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어서 더러운 뒤뜰에서 불법으로 정육점 작업대에 누워 시술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남겼다.

 

해넬은 3월18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그녀의 소송을 계기로 임신중단 광고뿐 아니라 법이 보장한 낙태까지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되자 “여성이 임신중단에 대한 정보를 얻을 권리를 보장하고, 논의가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난민 문제에서 진보적 정책을 펴 극우파에게 표를 빼앗긴 메르켈과 기민련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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