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청하라, 그러면 세상이 보인다
  • 김정헌 前 서울문화재단 이사장(화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05 13:36
  • 호수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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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은 그야말로 귀 기울여 남의 말을 듣는 일이다. 한마디로 경청은 쉽지 않다. 그냥 듣기도 힘든데 어떻게 귀 기울여 듣는단 말인가. 말이란 것은 조용한 대화도 있지만 소음에 가까운 시끄러운 소리 지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성별로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나이나 계급별로 차이가 나기도 한다. 당연히 말하는 공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러니 경청이란 가만히 대화하듯이 말할 때만이 가능하다. 사실 ‘가만한’ 대화는 인간 사회보다는 숲과 같은 자연과의 대화에서 더 가능하다. 입이 달리지 않은 숲 속의 나무에게는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야지만 겨우 나무의 속삭임이 들린다. 싹이 움트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들의 소곤거리는 소리, 낙엽을 떨구며 겨울을 준비하는 소리, 자연과의 대화는 감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우주와 자연을 지식으로 이해하고 파악은 하지만 감성적으로 대화하는 데는 서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학자 출신인 자기 대장에게 일장 훈계를 한다. “끼고 다니는 책을 몽땅 불살라 버리라고…나처럼 들풀, 빗물과 돌과도 대화를 하시라.” 그러자 대장은 “어떻게?”라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그 유명한 조르바 춤으로 그들(들풀·빗물·돌)과의 대화를 보여준다.

 

© 사진=Pixabay


 

아예 경청을 소재로 한 소설도 있다. 철학자 한병철이 사례로 소개한 미하일 엔데의 《모모》가 대표적이다. 이 소설에서 모모는 단지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말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일으킨다. 시간에 쫓기고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시간을 찾아준다.

 

비슷한 이야기로 한창훈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라는 우화소설 속에는 ‘쿠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집’ 대목이 있다. 여기서 쿠니는 공원에서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반복되어 쿠니는 경청 전문가가 된다. 노인네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쿠니에게 ‘발화’하고 자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자기 삶에 활기를 얻는다. 이렇듯 경청은 가장 바람직한 소통행위다. 점점 고립화되고 타자화되는 개인들을 구원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처럼 나이가 70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경청이 점점 더 힘들어진다. 어린아이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연결이 안 돼 남에게 함부로 떠들지 않지만, 어쩌다 보니 별별 세상을 다 경험한 노인들은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얘기를 들어줄 사람과 장소를 찾아 빙빙 거리를 헤맨다. 파고다공원에 가면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떠돌고 있는가?

 

노인들은 허리는 꼬부라져 가는데도 귀는 절대 기울이지 않는다. 특히 해방과 분단, 6·25전쟁과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은 노인들은 자기가 경험한 세계가 유일하다. 그러한 자기가 겪은 세계를 자꾸 ‘발화’하고 싶어 한다.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우리 사회는 이러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모모’나 ‘쿠니’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나 덧붙이자면 문재인 대통령의 요즘 행보를 보면 작년 취임을 전후해 그의 정신적 스승인 송기인 신부가 한 인터뷰에서 “그는 경청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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