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적이고 치밀했던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
  • 유지만 기자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8.04.16 15:10
  • 호수 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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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부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 조사결과 발표…9473명 지원배제 확인

 

박근혜 정부 시절 작성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실제로 작동한 것으로 확인됐다. 세월호 시국선언과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문재인 지지선언, 박원순 지지선언 명단에 오른 이들이 정부의 지원배제 명단에 포함돼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사실상 사찰에 가까운 감시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관 합동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는 4월10일 서울 광화문 KT빌딩에 있는 진상조사위 사무실에서 한-불 수교 130주년 ‘한불 상호교류의 해’ 관련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결과 브리핑을 통해 시국선언자 9473명의 명단이 담긴 블랙리스트 문건의 원본을 공개했다. 그동안 명단만 있을 뿐 실제 활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정부가 조직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을 검증하고 그 결과를 사업에 반영한 것이 확인됐다.

 

4월10일 서울 광화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한-불 수교행사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결과 브리핑에서 진상조사위가 9473명의 명단 등을 공개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에 블랙리스트 활용

 

진상조사위가 공개한 블랙리스트에는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594명, 세월호 시국선언 754명,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 6517명, 박원순 후보 지지선언 1608명 등 4개 분야 총 9473명이 기재됐다. 이 리스트는 2015~16년 추진된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고 진상조사위는 밝혔다.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는 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외교 행사이며 2015~16년 2년간 진행됐다. 총 사업비는 100억3000여만원으로, 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지출한 사업비를 합산하면 한국의 국제교류 사상 최장 기간,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다.

 

블랙리스트의 활용은 청와대와 국정원, 문체부가 주도했다. 청와대가 지시(교육문화수석실)→국정원이 검증→문체부가 블랙리스트 하달→프랑스 주재 한국대사관이 점검→해외문화홍보원이 실행 등의 과정을 거쳤다. ‘한불 교류의 해’ 사업 실무 기관인 해외문화홍보원은 2015년 문체부에서 받은 블랙리스트 2부를 출력해 사업에 참여하는 문화예술인 명단과 일일이 대조해 ‘문제 인물’을 걸렀다. 이원재 대변인은 “기본적으로 청와대와 국정원, 문체부는 늘 블랙리스트 업무를 관장했다”며 “사업에 따라 여러 소관부처를 아래에 끼워 넣어 지시하는 방식으로 블랙리스트를 운용했다”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문체부 오아무개 사무관이 해외문화홍보원에 직접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상조사위는 해외홍보원 관계자 A씨가 보관해 온 A4용지 60쪽 분량의 블랙리스트 원본을 확보했다. A씨는 “오 사무관이 주는 걸 받아 오라고 해서 받아 봤더니 블랙리스트였다. 상관인 박아무개 당시 해외문화홍보기획관에게 보고하니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이 민감하게 생각한다. 본부(문체부)에서도 명단을 보고 있으니 잘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문화예술인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정부에 반대하는 예술을 할 거면 자기 돈으로 하라는 건데 뭐가 문제냐. 영혼을 찾으려면 다른 일을 하지 왜 공무원이 됐느냐’고 질책받았다”고 진술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공개한 블랙리스트 원본의 표지 ​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세밀하게 지시

 

청와대와 문체부로부터 내려온 지원배제 지시는 세밀하게 진행됐다. 박근혜 정부는 ‘한불 상호교류 해’ 사업 중 하나인 프랑스 세르누치 박물관이 주관한 ‘프랑스의 한국화가들’ 전시사업에서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에 대한 출장비 지원을 철회했다.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이응노 작가를 위한 재단을 운영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은 이응노미술관의 이름을 사업과 관련된 모든 보도자료와 홍보자료에서 뺄 것을 지시했다. 이에 기존 ‘이응노에서 이우환: 프랑스의 한국화가들’이라는 전시의 원제는 ‘서울-파리-서울: 프랑스의 한국작가들’로 변경됐고, 수행단체도 이응노미술관이 아닌 ‘(재)대전고암미술문화재단’으로 바뀌었다.

 

행사를 추진했던 이응노미술관 측은 ‘예산이 정말 늦게 집행돼 힘들었던 사업’으로 기억했다. 이응노미술관 관계자는 “해외 전시의 경우에는 운송과 보험 문제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산 집행이 필수인데, 당시 예산 집행이 너무 늦게 이뤄졌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전시회를 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은 “당시 정부에서 배제한다는 막연한 느낌은 있었지만, 워낙 일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다. 이번에 진상조사위의 조사결과를 접해 보니 그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더라”고 말했다. 또 “전시회 프레스오픈 당시 프랑스 신문기자들만 와 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 측으로부터는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공연 분야에서는 ‘무브먼트당당’ ‘빛의 제국’ ‘이미아직’ 등의 공연에서 블랙리스트 예술인 배제 시도가 있었다. 연극팀인 무브먼트당당은 프랑스 측의 초청으로 연극 《벗어난 원리들》을 공연하기로 돼 있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는 이 공연을 철회하려 했으나 프랑스에서 초청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철회 시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취소되지는 않았다. 무브먼트당당의 김민정 연출은 시사저널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예산 집행이 상당히 더뎠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극팀 21명의 항공편 예약뿐만 아니라 운송에 차질이 생길 뻔했다. 이 문제로 계약이 계속 미뤄져 ‘결국 공연을 못하겠구나’란 생각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지원배제 문제는 2013년부터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에 공식적인 사실로 밝혀지니 씁쓸하다”고 전했다.

 

배제된 작가가 프랑스의 반발로 다시 초청되는 일도 있었다. 문체부가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 중 하나로 준비한 2016년 3월 ‘파리도서전’에는 명단에 이름이 오른 유명 작가들이 참가하지 못했다. 사업을 추진한 한국문학번역원 담당자는 2015년 7월 프랑스 내 한국문학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와 함께 작가 명단을 보냈다. 담당자는 한 달 뒤 문체부 출판인쇄과 직원 이아무개씨에게서 “가능한 작가군을 노란색으로 표시했다. 이들 중에서 선정하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이 메일에는 황석영·김애란·한강·은희경·김연수·공지영·임철우·편혜영·유은식·김훈·박민규·박범신·이창동 등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지 않았다. 이른바 ‘배제 대상’이었던 셈이다. 급기야 프랑스 조직위가 “우리가 돈을 내겠다”며 황석영·김애란·한강·임철우 작가를 직접 초청했다. 또 당시 프랑스한국문화원장은 2013년과 2014년 파리한국영화제 상영 준비 과정에서 영화 《설국열차》 《변호인》 《다이빙벨》 《관상》 《지슬》 《자가당착》 등을 상영할 수 없는 영화로 규정하고 사전에 준비하라는 이메일을 문체부에 보내며 조직위원회 차원의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원재 진상조사위 대변인은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는 2년간 국가기관을 총동원해 실행한 ‘블랙리스트의 종합판’”이라며 “박근혜 정부는 문화예술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중대 국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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