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은희 생전 인터뷰 “해야할 일이 많은데…"
  • 노진섭 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18.04.17 09:2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우 최은희씨, 2008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 화제

 
고 신상옥 감독과 함께 납북되는 등 영화 같은 삶을 산 원로 배우 최은희씨가 4월16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최근 일주일에 사흘씩 신장 투석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된 최씨는 병원에서 치료 도중 사망했다. 지난해 11월 열린 남편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보였다.

 

최은희씨는 1960~197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상록수》 등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다. 영화만큼 삶도 극적이다. 남한, 북한, 미국을 전전했던 그녀는 두 남편의 아내로, 자신이 낳지 않은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아왔다. 첫 남편은 촬영감독 김학성씨였지만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말 많았던 생애만큼이나 갖가지 소문이 평생 따라다녔다. 신상옥 감독과 사랑을 나눌 때 숱한 화제를 뿌렸고, 그와 함께 납북되었을 때는 공산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다. 특히 북한에서 살았던 8년 동안 그녀의 삶은 꼬일 대로 꼬였다.

 

시사저널은 10년 전인 2008년 최씨를 인터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최초로 '김정일이 말한 3년 후 통일'이라는 사실을 밝혀 화제가 됐다. 최씨는 인터뷰를 시작하자 대뜸 자신의 인생에서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고 싶다고 했다. 무엇이 그렇게 왜곡되었느냐고 묻자 “신 감독과 나를 공산주의로 매도하고…”라고 답변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살려가며 자신의 삶과 혼신을 바쳤던 영화, 뜻하지 않았던 북한 유랑 생활 등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다음은 당시 최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시사저널 자료

 

 

김정일에 의한 납북이, 알려진 것처럼 신상옥 감독을 북한으로 데려오기 위한 것이었나? 


북한은 모든 일에 치밀한 작전을 꾸민다. 그런 면을 볼 때 낙후된 북한 영화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신 감독을 납치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신 감독 납치가 여의치 않으니까 나를 먼저 납치한 것 같다. 내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신 감독은 나를 찾겠다고 홍콩까지 왔다가 납북되었다. 내가 납북되어 울고 불며 다시 남한으로 보내달라고 여러 번 떼를 쓰니까 김정일이 '3년만 있으면 통일되는데 그것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다. 통일되면 식구도 만나고 신 감독도 만날 수 있는데 그때까지만 참으라고 했다. 또 여러 해가 지난 후 김정일은 영화배우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는 물론 신 감독까지 (북한으로) 곧 데려올 것이라고 했다. 혹시 신 감독까지 납북하려는 것인가 싶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윤정희와 백건우 부부 납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결국 신 감독을 납치해왔다.

 

 

영화산업 부흥이 신 감독을 납치한 목적이었다면 김정일은 왜 그를 5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었는가?


(목소리를 높이며) 항간에는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가 무성한데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는데, 일일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다. 신 감독은 좌익 사상을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니다. 영화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1·4 후퇴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이고, 성격도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일하는 타입이다. 내가 오죽하면 야생마라는 별명까지 붙여주었겠는가. 그런 사람이 모든 것을 감시하는 북한으로 월북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신 감독은 북한에서도 틈만 나면 탈출을 시도했다. 네댓 번 탈출했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갖은 고문을 받았다. 그러니 감옥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홍콩에서 이상희라는 여성에게 포섭되어 납북된 것으로 안다. 그녀는 누구인가?


당시 홍콩에서 김규화 신필름 홍콩지사장으로부터 소개받아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조총련 쪽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의 공작원과 선이 닿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시 나와 함께 납북되었고 당이 운영하는 사업소의 지배인을 맡아 일하게 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 숙청당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최은희씨를 바치기 위해 납치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내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긴 때여서 납치한 이유가 궁금했다. 김일성이 나를 탐하려 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붙잡혀 끌려가다가 탈출한 것도 생각나고…. 아무튼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 아니다.

 

 

김정일을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가?


어디를 가나 접하는 질문이다. 내가 김정일을 제일 오래, 가까이에서 만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리를 강제 납북시킨 점으로 보면 인간성이 잔인한 사람이다. 예술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점으로 보면 괜찮은 사람이다. 결단력이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한다. 한마디로 쾌남아라고 표현할 수 있다.

 

 

1986년 북한을 탈출해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북한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50만 달러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1년쯤 지나자 신 감독은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정부 기관의 만류가 있었지만 신 감독은 죽어도 좋으니 일을 하겠다고 해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사실 그 당시 김정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당시 북한에 짓고 있던 영화촬영소도 완공되었으니 북한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당 간부를 통해 전해왔지만, 우리를 해치려는 사람과 만날 이유가 없었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어졌다.

 

 

1999년 영구 귀국한 후 불편한 점은 없는가?


불편이 있다고 어쩔 도리가 있는가. (한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미국에서의 생활 여건은 좋았지만,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남의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귀국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말은 통하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나는 정치는 모르니 정치 얘기는 접어두자. 다만 북한을 방문한 대통령 일행은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납북되어 남포항에 도착했을 때 거기까지 김정일이 마중을 나왔다. 또 중앙당사에서 연회를 할 때면 현관까지 마중을 나와 예의를 갖추었다. 어른에 대한 예의든, 예술인에 대한 예의든 그는 나를 항상 깍듯하게 대했다. 그런 대우를 대통령 일행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외국 여성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한 번은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 북한의 지도원과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알고 보니 요르단 여성이었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모르지만 교사 자격으로 북한에 와 있다고 들었다. 나도 그렇고 외국 여성도 억류되어 있다 보니 피차간 사람이 그리웠다. 그러나 감시원들 때문에 오며 가며 스쳐 가는 정도였지 직접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나는 북한에서 소일거리로 뜨개질을 했다. 재킷도 만들어 입었는데 그것이 좋아 보였던지 그 외국 여성이 다른 사람을 통해 구할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갖고 싶어 하는 눈치여서 모자를 떠서 건네주었더니 고맙다며 손수건 두 장을 답례로 보내왔다. 일본·프랑스 여성도 볼 수 있었다.

 

 

공영옝이라는 중국인 여성을 기억하는가?


미스 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평양 인근 동북리 초대소에 감금되어 있을 때 만난 중국인 여성이다. 그곳은 일반 사람은 얼씬도 하지 못하는 곳이어서 항상 사람이 그리웠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인적 드문 산길에서 마주친 사람이 당시 스무 살쯤 된 미스 공이다. 어떻게 사는지…. 지금도 그녀를 위해 기도한다.

 

 

북한이 왜 외국인을 납치해 억류한다고 생각하는가?


(목소리 톤을 높이며) 왜 새삼스럽게 북한 이야기를 자꾸 묻는가. 북한에 대해 아무리 말을 해도 정치인조차 이해를 못 해서 답답하다.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하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반인들의 대북관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답답하다. 얘기는 하고 싶은데 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되니 답답하다. 다만 6ㆍ25 때 전쟁과 인민군을 경험한 세대가 아직 살아 있는데 이를 뒤집는 대북관이 팽배하니 당황스럽다. 남북한 정부와 고위 정치인을 모두 접해본 사람으로서 현재 국내의 반공 사상이나 대북관을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후손에게 왜곡된 진실을 남기는 것 같아 분통이 터진다. 내가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여러 정치인을 만나 북한의 실상을 전해주면 믿지 않는다. 답답한 노릇이다. 북한은 결코 겉만 봐서는 모르는 곳이다.

 

 

북한에서 영화에 대한 지원은 어떠했나?


신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가 한 8편 정도 된다. 당시 신 감독이 늘 하던 이야기가 있다. 북한에서 유일하게 좋은 것이 제작비 걱정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점이라고 했다. 현지 촬영을 가게 되면 헬리콥터가 지원되었고, 엑스트라 인원 동원에도 무리가 없었다. 영화산업 수준은 낙후되어 있었지만, 영화에 대한 지원은 최고 수준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신 감독이 제작하려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는데 사실인가? 


그 당시 한국전쟁을 다룬 《크리스마스 카우보이》라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 미국에서 자료 수집까지 마쳤고 문화관광부장관 등도 만나 우리 정부와 군의 협조도 요청했다. 앞에서는 좋은 영화가 될 것이라면서도 실제로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전쟁을 소재로 다룬 영화여서 정부의 지원 없이는 만들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지원을 해주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만들지 못했다.

 

 

요즘의 영화를 어떻게 평가하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얼마 전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부부들이 자주 보였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외화였다. 물론 우리 영화가 아니고 오락영화이지만 과거의 향수를 느끼기 위해 중년들이 영화를 보러 온 것 같았다. 중년을 위한 영화가 없을 뿐이지 중년들이 영화를 멀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꼈다. 고품질의 영화를 만들면 우리 영화계에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영화 자체가 아니라 관객을 보고 느꼈다. 우리나라 영화 중에는 《강철중》《​크로싱》​《​밀양》​ 등 문제작들을 보았다.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해보고 싶은 영화가 있나?


과거에 만들었던 영화 중에서 좋은 작품을 리메이크해서 다시 선보이고 싶다. 예를 들면 1963년 작 《​로맨스 그레이》​의 시나리오는 지금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년들이 감동을 느끼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한다.

 

 

우리 영화계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얘기해도 먹혀들지도 않을 뿐더러 욕이나 먹지 않겠는가. 얘기한다고 해서 충고를 받아줄 영화인이 없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영화계 선후배 관계가 다 끊어진 것은 아쉬운 일이다.

 

 

지난 4월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영화인 35명을 선정했는데 혹시 빠진 사람이 있는가?


여배우로는 엄앵란씨가 빠졌다. 나와 신성일씨는 선정되어 핸드프린팅까지 했지만 엄씨가 빠져 마음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여러 전문가가 평가했다고는 하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앞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할 생각은 있나?


굳이 출연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우리 같은 노배우들이 설 자리가 있는가. 모두 젊은 층을 대상으로 만든 자극적인 영화들뿐인데 말이다. (웃음)

 

 

남은 생애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신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을 담은 박물관을 건립하고 싶다. 신 감독은 기획·감독·제작·촬영·편집까지 1인 5역을 해낸 감독이다. 신 감독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사단법인 ‘신상옥 감독 기념사업회’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를 통해 1950년대부터 이어져 온 신필름의 역사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신 감독은 생전에 《​칭기즈칸》등 4~5개 시나리오를 영화로 제작하고자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신 감독의 꿈을 아들(신정균 감독)을 통해 이루고 싶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웃음)

 

 

신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부드러운 사람이다. 함경도 사람이라 무서울 때는 아주 무섭지만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 감독은 연구 대상이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인물이다. 《​나는 영화였다》라는 책도 냈지만, 그는 정말 영화에 미쳐 있었다. 가족은 물론 심지어 자신도 잊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그를 표현하자면 에고이스트(egoist)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신 감독은 여자로,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다시 만나자고…. (웃음)

 

 

요즘 건강은 어떤가?


큰 문제는 없지만 나이를 먹으니 근력이 달린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조금 힘이 든다. 지난해 12월 얼음판에서 넘어져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다.

 

 

© 시사저널 자료

 

 

최은희는 누구인가?


1930년 11월9일 경기 광주에서 태어나 1943년 경성 기예학교를 다니던 중 극단 ‘아랑’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극배우로 활약했다. 1947년 《새로운 맹세》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현재까지 1백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한국 영화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전쟁 중 피란처인 부산에서 연극을 공연하다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1954년 결혼했다. 1978년 1월14일 북한으로 납북되었고 남편 신 감독도 그해 7월 홍콩에서 납북됐다.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당시 해외 영화제 수상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였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남편과 함께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이후 미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영화인으로 활동해오다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신 감독은 2006년 지병인 C형 간염으로 사망했다. 최근까지 서울 방배동에서 사촌동생과 살았다.

​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