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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국가 꿈꾸는 北, ‘리설주 여사’ 띄우기

[평양 Insight] 은둔에서 벗어난 그들…北 여인천하 시대 열리나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23(Mon) 08:49:24 | 14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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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생모 고용희는 28년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곁을 지켰다. 정혼한 것으로 알려진 부인 김영숙의 존재를 한·미 정보 당국은 김정일의 여성편력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지만, 그 실체가 드러난 적이 없다. 고용희는 사실상 김정일의 여인으로 자리했다. 김정일의 첫 여인으로 알려진 성혜림을 밀쳐내고 안방을 차지한 것은 물론 자신의 소생인 2남1녀 중 차남인 김정은이 절대 권력을 거머쥘 수 있도록 했다. 후계자 지위를 놓고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 태어난 장남 김정남 세력과 사활을 건 견제와 권력다툼을 벌인 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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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친모’ 고용희 평생 은둔

 

그런 고용희는 철저하게 은둔을 강요받았다. 2004년 유선암으로 치료를 받다가 프랑스 파리에서 숨질 때까지 한 번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함께 방북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혼자 나왔다. 2002년 8월 조선인민군출판사에서 고용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으로 찬양 선전하는 책자가 발간됐다는 첩보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런 생모가 안쓰러웠기 때문일까. 김정은은 집권 직후 고용희 우상화를 위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벌였다. 노동신문은 2012년 2월13일자에 고용희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양의 어머니’로 소개했다. 어린 김정은과 함께 밤늦게까지 집 앞을 서성이면서 현지지도를 나간 ‘장군님’(김정일을 지칭)을 기다리곤 했다는 찬양 스토리다. 고위 간부를 대상으로 고용희의 생전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을 방영하기도 했다. 이 영상에는 선글라스에 모피코트 차림으로 김정일과 군부대 등을 방문한 모습이 드러난다. 김정일 생일파티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평생 잘 모시고 따를 것을 다짐한다”는 충성맹세문을 낭독하는 이색적인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진전은 없었고, 고용희가 북송교포 출신이란 사실이 주민들에게 알려질 경우 부작용을 우려한 때문이란 얘기가 북한 내부로부터 흘러나왔다. 생모에 대한 대대적인 찬양 선전 등 가계 우상화가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여러 차례 나왔지만 북한 당국은 여전히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이처럼 생모를 평생 ‘얼굴 없는 여인’으로 살 수밖에 없게 한 아버지 김정일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리설주를 처음 공식 등장시키면서 ‘부인 리설주 동지’로 불렀고, 이후 이 호칭을 줄곧 사용해 왔다. 공개 활동에 수시로 동반토록 하면서 존재를 부각시켰다. 급기야 2월8일 북한군 창건 기념 군사퍼레이드 참석을 계기로 북한은 리설주를 ‘여사’로 부르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앞둔 터라 그녀를 퍼스트레이디로 등장시키기 위한 포석이란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리설주의 데뷔 무대는 북·중 정상회담이었다. 3월25일부터 나흘간 이뤄진 김정은의 전격적인 방중은 리설주를 국제 외교무대에 처음 퍼스트레이디로 서게 하는 자리였다.

 

김정은의 리설주 띄우기는 계속되고 있다. 4월15일 북한 조선중앙TV는 평양에서 하루 전 열린 중국 예술단의 방북 공연 소식을 전했다. 눈길을 끈 건 이 행사에 참석한 리설주에게 ‘존경하는’이란 수식어를 처음 사용한 대목이다. 중앙TV는 김정은 동정을 전담해 전하는 아나운서인 리춘희를 내세워 “존경하는 리설주 여사께서 당과 정부 간부들과 함께 중국 중앙발레무용단의 ‘지젤’을 관람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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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김여정의 부쩍 늘어난 광폭 행보

 

김정은을 동반하지 않고, 리설주가 독자 공개 활동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리설주는 최룡해 당 부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를 수행하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중국 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쑹타오(宋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그를 맞았다. 북측 간부 중에는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 제1부부장도 포함됐다. 올케와 시누이 사이인 리설주와 김여정은 쑹 부장 양옆에 앉았다. 평양 로열패밀리의 여인들이 이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김여정의 행보도 눈길을 끈다. 2월9일 동계올림픽 개막식에 파견된 북한 고위 대표단의 단원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온 김정은의 친서와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하는 내용으로, 사실상 3차 정상회담 개최 제안을 전달한 메신저 역할을 했다. 김여정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국은 물론 외신의 주목을 받았다. 7년 전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장에서 눈물짓던 때와 크게 달랐다. 세습 권력의 후계자로 등극한 오빠를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모습도 찾기 어렵다.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자 중앙당 제1부부장으로 우뚝 선 김여정은 남한 방문을 통해 자신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자 김정은의 최측근 보좌관으로 자리했음을 과시하려 들었다. ‘믿을 건 핏줄뿐’이란 남매의 의기투합 결과물이다.

 

29살 동갑내기인 리설주와 김여정은 ‘올케-시누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최고 권력자 김정은을 안과 밖에서 조력하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 당분간 리설주에게 더 큰 관심이 쏠릴 공산이 크다. 청와대와 정부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 리설주가 나올 공산이 크다고 본다. 리설주에게 ‘여사’ 호칭을 붙이는 쪽으로 결정하는 등 환대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평양 권력의 이면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권력의 뒤편에서 존재감 없이 숨죽이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불꽃같은 사랑이 타오를 때 잠시 반짝이다 소멸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열정이 식어버리면 버림받고 잊혀지고, 때론 몰락의 길을 걷다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다. 절대 권력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처절한 몸부림도 있었다. 자신의 소생을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한 투쟁은 마치 조선이나 고려시대의 궁중암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싸움에서의 패배는 곧 몰락과 죽음을 의미했다.

 

집권 7년 차인 김정은 정권은 기로에 섰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문재인 정부와의 관계를 설정해야 하고, 북·미 정상회담에선 트럼프 행정부의 비핵화 압박을 전술적으로 잘 막아내야 할 상황이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북한 체제의 명운을 시험하고 있다. 김정은의 승부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런 국면에서 권력 핵심 실세로 부상한 김여정과 리설주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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