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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도둑맞은 페미니즘

여성 철학자 니나 파워가 쓴 《도둑맞은 페미니즘》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26(Thu) 11:00:00 | 14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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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세 번째 남북 정상회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종전과 평화협정이라는 어휘가 뉴스로 소개된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했을 때 평화를 상징하는 초록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길거리 무대에서 파병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고 평화가 페미니즘이라고.

 

그런데, 잊어서는 안 되고 복기를 제대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음을 갑자기 깨닫는 일이 생겼다. 니나 파워라는 힘센 이름을 지닌 여성 철학자가 쓴 《도둑맞은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다. 그는 페미니즘이 두 방향에서 도둑맞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방향은 정치다. 미국의 군국주의 매파들이 아프간을 침략하기 위해 내놓았던 담론을 소개하면서, 페미니즘이 어떻게 전쟁광들에게 오용되었는지를 실감 나게 소개한다. 전쟁에 찬성하는 페미니스트라니,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또 한 방향은 경제(자본주의)다. 노동의 여성화, 여성의 소비자화 등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 페미니즘이 어떻게 남용되며 얼마나 끔찍한가를 실감 나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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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소개하기엔 짧은 지면에 이 책 이야기를 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시사저널 독자들께선 이 제목이 이 연재의 실질적 첫 글인 ‘박근혜가 드러낸 어떤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에 나오는 소제목 “도둑맞은 페미니즘은 여성 혐오로 돌아오고”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아채실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반여성적인 정치인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포장해 선거전을 치르고 그의 여성성을 새로운 정치의 표상으로 한껏 치켜세웠던 일, 막상 탄핵에 이르자 이번에는 그의 여성이란 성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 된 일 등 일련의 모든 행태를 도둑맞은 페미니즘이라는 말로 요약했던 것.

 

니나 파워는 아프간에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국주의 매파들이 했던 일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아들 부시의 부인 로라 부시가 라디오에 나와서 말한다. “오로지 테러리스트와 탈레반만이 매니큐어를 발랐다는 이유로 여성의 손톱을 뽑겠다고 협박한다.” 이렇게 해서 상당수의 페미니스트들이 전 세계에서 탈레반에 맞서 아프간 여성을 해방해야 한다는 대의에 동조하며 아프간 침략을 정당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프간에 파병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아프간 여성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 남성이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이상한지. 그러나 당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명료한 반대 논리를 구성하지는 못했고, 그래서 약소국의 경우 외세의 개입은 여성에게는 악몽을 다른 악몽으로 대체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반대했다. 이때 파병을 지지했던 여성들 중 일부가 나중에 박근혜 지지자로 등장했던 것도 떠오른다.

 

페미니즘을 정치가 오용할 때 벌어지는 일을 파워는 아주 간결하고도 강렬하게 이렇게 요약한다. “권력의 상층부에 도달한 ‘예외적인 여성들’과 소수자들이 그 자리에 그저 포함된 것이 아니라 때때로 그 자리의 가장 나쁜 양상을 대표하게 됐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성 정당 대표와 여성 국회의원과 여성 구청장이 ‘예외적으로’ 약진하는 동안 비정규직의 상당수를 나이 든 여성들이 메우며, 성매매로 내몰리게 되는 여성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 현실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주는 좋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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