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정은 혹은 ‘우아한 냉혹’
  • 정두언 前 국회의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09 10:19
  • 호수 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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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때 염두에 둔, 즉 모델로 삼은 인물이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다. 마키아벨리에게 정치의 목적은 오직 하나, 공고한 지배권을 수립하는 데만 있다. 거기서는 지배권의 정통성, 수단의 윤리성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든 한번 지배권을 손에 넣으면, 그다음 문제는 그 지배권을 어떻게 공고히 하느냐 하는 ‘아르테’, 즉 방책, 수단에만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의미에서 지배자는 잔혹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체사레 보르자는 역사적으로 잔혹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 잔혹함이 로마냐(Romagna)의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지방을 통일하며 평화와 충성을 지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쓴 시오노 나나미는 “적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 자기편을 잡는 것, 힘 또는 책모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민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동시에 무서운 존재가 되는 것, 군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혹은 가할 듯한 인간을 말살하는 것, 엄격함과 동시에 정중하고 관대하고 활달할 것, 위해를 가하려 하다가도 주춤거리도록 국왕 및 군후들과 친교를 맺는 것, 이상의 모든 사항이야말로 신군주국에 필요 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마키아벨리에게 체사레 보르자처럼 싱싱한 실례를 찾아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썼다.

 

4월27일 오후 남북정상회담 정상 내외가 평화의집에서 환담을 하고 있다. © 한국공동사진기자단


 

남북 정상회담이 끝나고 ‘판문점 선언’이 발표됐다. 한반도의 온 민족과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열린 이 세기의 회담은 흥행에서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흥행의 두 주역인 문재인과 김정은 중 김정은의 변신과 반전은 단연 압권이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가히 아이돌급 인기를 얻은 김정은이 평양으로 귀환하고, 이제 평정심을 되찾은 필자의 심정은 솔직히 어안이 벙벙하다. 얼마 전까지 김정은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약관 20대 말에 시대착오적인 김씨 세습왕조의 권력을 물려받아 ‘군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혹은 가할 듯한 인간들을 잔혹하게 말살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평화, 새로운 시작’의 시대를 연 주인공이 된 것이다.

 

 김정은이 도발에서 평화로 방향을 튼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중국까지 가담한 국제사회의 ‘최대 제재’가 그 하나요, 또 하나는 내부적 체제 안정에서 나온 자신감이다. 체제 안정의 본질은 김정은 지배권의 공고화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김정은은 이제 3대에 걸쳐 숱한 난관을 뚫고 이룩한 핵과 미사일의 완성을 내부적으로 공고화된 지배권의 보장과 맞바꾸려 하고 있다. ‘위해를 가하려고 하다가도 주춤거리도록 국왕 및 군후들과 친교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막대한 재원과 인민 희생의 대가로 성취한 핵 무력 자산은 결과적으로 김정은 지배권의 공고화를 위한 방책, 수단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21세기의 희귀한 군주 김정은은 체사레 보르자와 많은 면에서 비교된다. 심지어는 청년급제와 혈육을 제거한 것까지. 혹시 김정은이 체사레 보르자를 벤치마킹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하지만 체사레 보르자가 활약하던 시대는 15세기 말 16세기 초 도시국가 시대였다. 시대가 바뀌어도 엄청나게 바뀐 21세기 초에 체사레 보르자는 일종의 전설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 한반도 북녘 땅에는 전설이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불편한 진실이지만. 이번 회담을 통해 우리는 남과 북이 각각 하나의 국가로서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만큼 1국 2체제 등 통일의 구호는 한낱 환상으로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여 남녘의 우리는 이제 김정은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부디 북한 사회에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일으키는 계몽군주로 또 한 번 변신과 반전을 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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