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 반납하라" 들끓는 여론에 여야 '등 떠밀리듯 합의'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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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파행' 수순, 평화당 본회의 참여하자 18일 추경-특검 동시처리 합의

 

'벼랑 끝 전술'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지금의 러시아)이 주로 펼치던 외교 정책이다. 전쟁, 파국을 향해 치닫는 듯이 나와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는 게 목적이다. 냉전 이후 용도 폐기됐다가 북한이 차용하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이마저도 최근 한반도 대화·평화 국면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추세다. 그런데 엉뚱하게 한국 국회에서 그 유령이 나타났다.

 

5월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여야 4당 교섭단체 정례회동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국회 파행 불사하던 여야, 막다른 길에서 겨우 정상화 물꼬


여야는 5월14일 오후 6시30분을 넘겨 가까스로 국회 정상화에 합의했다. 드루킹 댓글 조작 사건의 특별검사 법안과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오는 18일에 함께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국회 정상화 합의에 따라 이날이 시한인 6월 지방선거 출마 국회의원들의 사직 안건 처리를 위한 본회의가 열린다. 본회의가 열리면 자유한국당의 홍문종·염동열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자동 보고돼 72시간 안에 처리해야 한다.

 

당초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본회의 입장을 거부했다. 민주평화당과 정의당이 본회의 참여를 결정해 정족수를 채우는 상황이 되자 분위기가 급반전했다. 거듭된 국회 파행 속 "세비를 반납하라"는 비판 여론이 들끓으면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부담이 가중됐다. 민주당은 여당으로서 국회 파행을 방치했다는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 한국당은 사실상 범여권의 안건 강행 처리를 구경만 해야 하는 무기력함이 향후 정국에서 전혀 득 될 게 없었다.  

 

이날 오전만 해도 합의는 난망한 분위기였다. 6·13 지방선거 출마 의원들의 사직 안건 처리 등 국회 현안을 놓고 머리를 맞댔으나 절충점을 찾지 못했다. 먼저 이날 오전 10시30분께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김성태 자유한국당, 김동철 바른미래당, 노회찬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정세균 국회의장 주재 정례 회동에 참석했다. 이어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윤재옥 자유한국당, 오신환 바른미래당, 이용주 평화와 정의의 의원모임 원내수석부대표가 오후 1시30분 역시 국회에서 만났다. 분명 '국회 정상화'란 당위적인 목표를 위해 만났는데, 합의는 요원했다. 아니, 애초에 타협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이날이 처리 시한인 의원 사직 안건과 함께 드루킹 특검을 동시에 처리할 것을 주장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드루킹 특검 문제는 '의원 사직 원포인트 본회의' 이후 논의하자는 입장이었다. 정세균 의장과 민주당은 이날 의원 4명의 사직서 처리가 안 되면 4곳 보궐선거를 이번 지방선거가 아닌 내년 4월에나 치러야 하기 때문에 원포인트 본회의가 불가피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한 바 있다.

 

국회 공전·마비 사태는 지난 4월2일부터 시작됐다. '민생을 외면한다'는 국민 비판에도 여야는 파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정세균 의장이 정상화 시한으로 제시했던 5월8일 오후 2시는 속절없이 지나갔다. 여야 모두 '상대방이 양보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버텼다. 특히 야권에선 "민주당이 끝내 특검을 거부할 경우 특단의 대책과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숙의할 것"(김동철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국회 정상화) 논의가 안 되면 정치 생명을 거는 중대한 결단을 하겠다"(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등 으름장이 난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이 특검 수사의 범위에 대한 여야 간 기본 합의는 어느 정도 이뤄졌다. 여야의 벼랑 끝 전술이 통했다면 통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계는 명확했다. 통 큰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절차상 문제에 불과한 의원 사직서 처리를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의원 사직 안건 처리 시한인 이날까지 여야는 전쟁을 앞둔 나라들처럼 으르렁거렸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한국당을 겨냥해 "국민의 참정권보다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행태가 실망스럽다"고 비난했다.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정세균 의장이 청와대와 민주당이 원하는 요구안만 원 포인트로 국회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는 것은 의회 민주주의를 걷어차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동철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도 "의원 사퇴서를 먼저 처리하고 결국 특검은 안 하려는 민주당의 꼼수"라고 말했다. 결국 국회에는 합의 기대감 대신 전운만 고조됐다. 한국당은 이날 오전 9시부터 국회 본관 로텐더홀 본회의장 입구를 막아선 채 의원총회를 이어갔다. 오후 4시로 예정됐던 본회의는 5시로 미뤄졌다. 경우에 따라 국회의장석까지 점거하는 방안도 한국당 일각에서 거론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야, 완전 정상화까지는 '아직'…현안 산적 


불필요한 우여곡절 끝에 국회는 파행 42일 만에 정상화의 길을 텄다. 이날 우려됐던 몸싸움도 벌어지지 않았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오후 5시께 본회의장 정문 옆에 있는 문을 이용해 본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당 의원들은 민주당 의원들을 몸으로 막지 않았다. '폭력 국회'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만들어진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2012년 5월2일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처리된 개정 국회법, 일명 국회 선진화법은 반복된 날치기와 여야 몸싸움을 막기 위해 국회의장 직권상정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고 의사일정 방해 행위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 규정을 신설했다. 법과 여론이 여야의 '몰염치'에 제동을 건 셈이다.

 

진통이 컸던 만큼 여야가 향후 합의된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지도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많다. 실제로 서로 간 앙금은 여전하다. 정상화 합의가 늦은 것 자체로 질타받아야 할 만큼 현안도 산적해 있다. 이날 앞서 정세균 의장은 SNS를 통해 국회에 계류 중인 안건이 많다는 점을 부각하며 조속한 국회 정상화를 촉구했다. 정 의장은 "20대 국회 들어 1만3099건의 법안이 제출됐는데 현재 계류된 안건이 9554건"이라며 "올해 들어서는 불과 690건밖에 법안을 처리하지 못했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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