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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얼마나 더 오래 이곳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재미 변호사가 보는 재밌는 미국] 국가를 위한 노장의 마지막 메시지, 존 매케인의 회고록

이철재 미국변호사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15(Tue)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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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포르노 배우 스토미 다니엘스(Stormy Daniels)의 이야기가 단연 톱뉴스이다. 트럼프와 다니엘스의 관계가 어떤 성격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많지 않다. 의견이 분분한 것은 이 관계를, 혹은 관계의 성격을 숨기기 위해 2016년 대선 기간 중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가 입막음용으로 13만 달러를 자비로 그녀에게 주었는지, 주었으면 그 사실을 트럼프가 알고 있었는지, 혹은 그 돈을 트럼프가 변호사에게 갚았는지 등이다.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위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3일 아침(미국시간)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이 트럼프의 변호사 자격으로 TV에 출연해 이 의문점들에 대해 여태껏 트럼프가 한 이야기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들어간 탓에 케이블 뉴스는 하루 종일 그 이야기를 시끄럽게 다뤘다. 그날 미국 공영라디오(NPR: National Public Radio) 저녁 뉴스 프로그램의 첫 소식도 그 이야기였다. 하지만 공영라디오가 그날 저녁 뉴스 기사 중 가장 오랜 시간인 8분여를 할애한 것은 트럼프도, 포르노 배우도, 13만 달러도 아닌 상원의원 존 매케인(John McCain)에 관한 것이었고, 매케인에 관한 그 기사가 공영라디오 저녁뉴스 사이트의 5월3일자 다시 듣기 톱뉴스로 올라갔다. 올해 82세의 애리조나 주 출신 6선 상원의원 매케인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공영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것일까? 

 

미국의 연방국회는 상원과 하원 양원제(Bicameral system)이다. 하원은 인구비례로 의석수를 정한다. 상원은 1주당 2명의 상원을 배정, 주의 인구와 상관없이 모든 주가 똑같이 두 표 씩 행사하게 한다. 하원의 임기가 2년인 반면 상원의 임기는 6년이고, 2년마다 재적 3분의 1의 상원을 돌아가며 새로 선출한다. 매케인은 1986년 레이건 대통령 2기의 중간선거에서 미국 보수정치의 거목 베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가 은퇴하면서 공석이 된 애리조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2016년 6선에 성공 했으니 올해로 상원 경력만 32년이다. 거기다 1982년부터 하원의원을 지낸 것을 합치면 그의 정치경력은 40년에 육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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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포로로 모진 고문 이겨내

 

정치에 입문하기 전부터도 그는 이미 미국 사회에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미 해군의 알레이버급 이지스함 USS 존 S. 매케인 (USS John S. McCain)의 존 S. 매케인은 매케인 의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John S. McCain Sr/John S. McCain Jr.)에서 따온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해군 4성 제독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자 4성 제독이었다. 이런 가문의 전통을 따라 매케인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그곳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1967년 10월 하노이 근처에서 비행기가 추락, 전쟁포로가 되어 부상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폭행과 심문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가 해군 제독이라는 것을 안 월맹군이 한때 그의 석방을 제안했으나, 매케인 자신이 다른 미군 포로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송환을 거부, 1973년 3월까지 수용소에 있으면서 심한 고문을 당해 지금도 팔을 머리 위로 들지 못하는 장애가 있다. 고문 끝에 자살기도까지 했으나 보초병에게 들켜 그마저도 실패하고 그는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해 반미 선전 영상을 만드는 일에 협조했다. 하지만 추가 협조를 거부해 또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훗날 출간한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가 조국을 비난하는 선전 영상을 만든 것을 놓고 얼마나 수치심을 느끼고 그 일로 괴로워했는지 엿볼 수 있다. 수치심 때문에 다시 고문을 당할지언정 더 이상 비난 영상에 협조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모든 인간은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고, 나 역시 인간인 고로 한계점에 다다랐던 것이다”라고 말하며 담담히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조국은 5년 반의 포로생활 끝에 살아 돌아온 그를 환영하여 그는 단숨에 유명인사가 되었고, 1974년 그의 군 계급도 회복되었다. 계속 해군에 근무하던 그는 1981년 예편한 뒤 이듬해 레이건 1기 중간 선거 때 공화당 후보로 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하원, 상원,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거치는 화려한 정치생활을 시작한다. 

 

남다른 경력과 집안 내력의 소유자인 그가 뉴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 한 사람에 관한 뉴스만 가지고도 시간이 모자랄 만큼 뉴스가 넘쳐났던 그 날 미국에서 공신력으론 첫 손 꼽히는 공영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이 긴 시간 매케인의 소식을 전한 것은 고개가 갸우뚱 해 질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매케인은 공화당 내에서 늘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우던 인물이다. 게다가 그는 현재 말기 뇌종양 투병 중이다. 그가 5월 말 회고록을 출간한다. 대통령을 비판하던 6선의 상원의원이 말기 암 투병을 하며 쓴 회고록이니 주목을 받을 만하다. 공영라디오 방송이 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그 발췌본을 매케인의 육성으로 녹음하여 내보내고 뒤이어 회고록을 이미 읽은 취재 기자가 나와 앵커와 대담 형식으로 책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매케인이 조국에게 보내는 시빌리티 위한 마지막 호소”

 

매케인이 읽은 발췌본은 “제가 얼마나 더 오래 이곳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I don’t know how much longer I’ll be here)”로 시작한다. 시시각각 다가오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의식한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알았던, 그가 사랑했던 미국의 모습 혹은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국의 모습을 그린다. 실수도 하고, 욕심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세상의 득이 되고자하는 노력도 그에 못지않게 하던 나라, 의견이 달라도 존중하면서 살던 나라다. 곧 이어 그는 너와 나로 갈라져 상식이 통하지 않고, 남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아니면 모두 적으로 보는 모습으로 변한 미국을 개탄한다. 이어지는 그의 부탁은 “인간이 모두 존귀하게 태어났고, 자유와 인권은 모든 사람의 심장에서 태동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이다. 그리고 “인간의 권리에 대한 우리 모두의 헌신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유산입니다”라며 마침표를 찍는다. 자신은 애리조나의 골짜기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다 자신의 절친했던 친구 척 라센(Chuck Larsen)이 묻힌 옆으로 가겠노라는 말도 덧붙인다.

 

너무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의 절절한 나라 사랑하는 마음만은 잘 전해진다. 그가 언급한 척 라센은 매케인의 해군사관학교 동급생으로 사관학교 근처의 묘지에 묻혀있다. 매케인은 이미 죽을 준비를 마치고 피를 토하듯 조국에 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영라디오 뉴스 앵커는 이 책을 매케인이 조국에게 보내는 시빌리티를 위한 마지막 호소(The last plea for civility)라고 했다. (주: Civility는 사전에 주로 예의라고 나오나 그보다는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는 시민들 간의 품격 있고, 사회질서를 존중하는 행동방식이라는 의미로 우리말로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트럼프 대통령과 매케인의 불편한 관계는 이미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기위해 다른 후보들과 경쟁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세 중 유색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막말을 쏟아내는 그를 매케인이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선 후에는 러시아와 트럼프 선거 캠프가 내통하여 2016년 대선에 불법 개입했다고 공공연히 비판을 했다. 매케인이 공영라디오에서 읽은 글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비판보다는 오히려 그를 두둔하며 거기 붙어 권력을 누리기 바쁜 공화당 의원들을 꼬집는 것이고, 이들이 야기하는 법치주의의 위기에 대한 우려라는 점은 웬만한 사람이면 대번에 눈치 챌 수 있다. 

 

매케인은 뼛속까지 공화당원이면서도 아니다 싶으면 당론에 가차 없이 반기를 들어 ‘매버릭(Maverick, 이단아)’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변질되어버린 공화당에 호통이라도 한번 치고자 한 것이 회고록 집필의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쓴소리가 이 책의 유일한 메시지는 아닌 것 같다. 책을 이미 다 읽은 기자가 전하는 말은 매케인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트럼프와 공화당을 비판해 온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물러서지 않지만, 그 안에 험담이나 폭로는 없고, 오히려 매케인 자신에 대한 성찰(省察)과 과오의 인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고 한다. 

 

그는 왜 험담이나 폭로보다는 성찰의 길을 택했을까 생각해본다. 누구보다 치열한 삶의 굽이를 돌아 여기까지 온 그는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던 포로 생활보다 더 불확실한 죽음이라는 미래를 마주하고 섰다. 조국을 향해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은 그가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는 바로 나를 먼저 정화하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회고록 안에 자기 정화의 불씨를 남겨 자신의 사후에도 그 불씨가 세상에 번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의견과 비판이 난무하는 24시간 케이블 뉴스 시대에 사라져가는 시빌리티를 되살릴 길이 자기 정화일지도 모른다. 험담과 폭로보다는 자기 정화를 택한 그에게 감사한다. 무엇보다 그간 우리가 보아온 매케인에 어울리는 선택을 해줘서 감사하다. 그가 떠날 때 시빌리티도 함께 떠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매케인의 약간은 떨리는듯하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제가 얼마나 더 이곳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매케인만의 넋두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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