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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분단 극복’의 현장, 독일을 가다

분단 동·서독 이어준 23개의 ‘길’…냉전 관계 녹인 유일한 길은 교류와 협력

김성진 시사저널e. 기자 ㅣ star@sisajournal-e.com | 승인 2018.06.05(Tue) 14:00:00 | 14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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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이 마주한 4월27일, 남북 정상회담의 화두는 남과 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의 연결 사업 이야기였다. 한반도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주요 의제로 하는 북·미 정상회담이 순조롭게 끝난다면, 남북을 잇는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와 함께 분단국의 아픔을 경험했던 독일은 베를린 장벽으로 나뉘어 있을 때도 동·서독을 잇는 교통 인프라를 통해 경제 교류와 협력을 했다. ‘길’을 통해 동·서독은 소통했고, 분단을 종결시켰다. 창간 3주년을 맞은 시사저널e는 우리보다 앞서 분단 시절을 극복한 독일을 직접 찾아, 경제 교류 등 상호협력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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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채 코의 느낌만으로도 독일 베를린의 공기는 구별할 수 있었다. 베를린은 다른 독일 도시와는 모순적인 냄새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베를린의 공기는 더러우면서도 자유롭고, 폭력적이면서도 평화롭다. 지하철을 지배하는 숨 막히는 지린내 속에는 지난 1970년대 ‘플라워 파워’를 외친 히피 문화가 남아 있다. 극우 네오나치들이 뿜어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화약 냄새 맞은편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이민자들이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서 있다. 베를린에는 과거 분단 시절 향수가 밑바닥에 하나의 층위를 이루고, 그 위에는 통합의 냄새가 섞이지 않은 채로 흐른다.

 

베를린의 모순적인 냄새는 모순적인 과거에서 비롯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은 연합군과 소련에 분할되고, 1961년엔 장벽이 세워지며 분단됐지만, 역설적으로 이 분할과 분단이 독일 통일을 가능케 했다. 이은정 베를린 자유대 한국학연구소장은 “(독일 분단 시절에) 베를린이 없었으면 동독과 서독을 잇는 길도 없었다. 한국과는 조건이 다르다. 서베를린은 동독 한가운데 있던 섬이다. 서베를린으로 오기 위해 고속도로를 닦았고, 철도협정을 했고, 우편 교류를 했다. 모든 것이 베를린 때문이다. 이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경제 협력 얘기를 하기는 어렵다”고 단언한다.

 

베를린은 분단 당시 동독 지역 한가운데 자리했던 탓에 서독 입장에선 서베를린 지역은 고립된 섬과도 같았다. 한반도로 치면 북한 평양의 절반이 남한 땅이었던 셈이다. 서독 사람들은 서베를린에 남겨진 가족, 친구들과 연락하려고 어떻게든 ‘길’을 연결하려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길들은 유럽 전역으로 통하는 하나의 네트워크로 발전해 양극단의 문화가 공존하는 베를린의 모순적인 냄새를 만들어냈다.

 

분단 이후 통일까지 서독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시간이 흐르며 동독과 서독을 넘나드는 길의 문턱은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했지만, 양쪽 지역 주민들 사이엔 언제나 소통과 교류를 위한 길이 존재했다. 통일 이전까지 동·서독 간에는 도로 10개와 철도 8개, 내륙운하 2개, 그리고 항공로 3개 노선 등 육·해·공 23개의 길이 국경을 가로질렀으며, 동·서베를린 간에는 8개의 통과로가 존재했다.

 

 

소통의 ‘길’을 뚫어라…동·서독 간의 끊임없는 노력?

 

동·서독 간 소통의 가장 큰 위기는 1961년에 발생했다. 전쟁 직후 동·서독은 비슷한 경제 수준을 누렸다. 그러나 서독 지역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며 동·서독 주민들 간의 생활수준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졌다. 요헨 슈타트 베를린 자유대 독일분단연구소장은 “동독 지역 노동자들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TV와 라디오로 서독 주민들의 삶을 훔쳐봤다. 베를린은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가장 용이한 지역이었고, 1961년까지 동독 주민 20%가량이 서독으로 빠져나갔다. 특히 동독의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 유출은 동독 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동독 주민들의 이탈 현상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속화했다. 이에 동독과 소련은 1961년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장벽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장벽은 사람 두 명 높이에 약 160km에 달했다. 장벽을 세우는 데는 총 400만 마르크의 비용이 들어갔다. 장벽 곳곳에 설치된 검문소는 촘촘한 그물코처럼 사람들의 통행을 걸렀고, 장벽은 단숨에 동·서독 교류를 차단하는 상징이 됐다. 동독과 소련은 베를린 장벽을 중심으로 서독과 맞댄 경계선을 치밀하게 관리했다. 길이 끊어지는 동시에 동·서독은 소통 단절의 위기에 처했다.

 

1961년 불쑥 솟아난 장벽에도 불구하고 서독은 동독에 길을 잇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서독은 교통망 연결에 열을 쏟았다. 그중에서도 도로는 동·서독을 잇는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됐다. 통일 이전 도로를 이용한 여객은 전체 여객 중 85%에 달했다. 철도가 14%로 뒤를 이었고, 해운과 항공의 비중은 미미했다. 화물 역시 60%가량이 도로를 통해 운반됐다.

 

과거 동·서독 접경지역 헬름슈테드·마리엔 본에서부터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A115’는 동·서독을 연결했던 대표적 길 중 하나다. 바로 이 길 위에 분단 시절부터 통일을 맞이한 그때까지 독일의 교류와 단절, 소통의 역사가 함축돼 있다. 고속도로 A115 처음과 끝에 당시 연합군이 세웠던 주요 검문소 중 두 개가 자리한다. 서베를린 드라이린덴 지역에는 지금도 체크포인트 브라보의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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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은 1972년 교통협정을 맺고 도로·철도·수로 등 인프라 구축에 적극 나섰다. 특히 동·서독 양측에 실리와 명분이 충분했던 고속도로 A115에 대한 대대적 투자가 이뤄졌다. 동·서독은 총 4억500만 마르크의 비용을 지출하며 도로의 노면을 보수하고 6차로로 확장했다. 이외에도 동·서독은 1980년 베를린-함부르크 간 고속도로 사업에 착수했고, 베를린 남부 텔토브 운하를 재개통하는 등 장기적 인프라 구축과 동시에 소통 창구를 뚫어냈다. 다음은 이은정 소장의 설명이다. 

 

“장벽이 세워지기 이전엔 사람들이 고속도로 위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다. 전철이 베를린 시내를 빙빙 돌았었다. 장벽이 세워지고 그게 불가능해졌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게 완전히 분단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인프라 투자에 대한 모든 접근은 분단 가족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통일은 나중이었다. 1971년 교통협정이 기본적으로 만들어질 때도 소통, 그 냉전에서의 긴장관계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소통뿐이었다.”

 

장벽이 무너지자 전 세계로 연결해 준 ‘길’

 

베를린 시내 중심에 위치한 지하철 코흐슈트라세역을 나오면 과거 동·서베를린의 체크포인트 찰리가 10m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프리드리히 거리와 짐머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체크포인트 찰리는 현재 관광 명소 중 하나다. 검문소는 멀리서도 한눈에 띈다. 검문소 앞에는 약 3m 기둥 높이에 문짝만 한 직사각형 사진이 앞뒤로 붙어 있다. 동독 쪽에서 바라보면 미국 군인이, 서독 쪽에서는 동독 군인 사진이 박혀 있다. 관광객들은 그 아래서 미국 군인 복장을 한 사내들에게 2유로를 건네주며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과거 호주머니를 뒤지며 살벌하게 검문하던 장소는 이제 세계인이 찾는 명소로 변모했다. 베를린 북쪽의 베르나우어 거리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 추모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회색빛 장벽 대신 양방향이 훤히 보이도록 장대들이 꽂혀 있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은 뚫린 공간에 서로 시선을 던지며 걷는다. 과거 단절됐던 공간이 하나씩 무너질 때마다 하나의 길이 태어났고, 그렇게 탄생한 길은 다른 길과 이어져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베를린엔 여전히 동독인들의 편견 섞인 시선과 이념 대립이 존재한다. 지금도 길거리엔 칼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의 사상들이 현대 자본주의와 자유롭게 배회한다. 그렇지만 과거와 같은 폭력과 단절은 없다. 단지 같은 공간에 서로 부대끼며 존재할 뿐이다. 이 모든 모순적 평화는 모두 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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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과 북, 정서적으로 먼저 연결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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