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중견기업에도 칼 들이댄 국세청
  • 유재철 시사저널e. 기자 (yjc@sisajournal-e.com)
  • 승인 2018.06.11 10:21
  • 호수 1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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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산업·하이트진로 등 ‘좌불안석’…중견기업 편법승계 정조준?

 

“조금 조용한가 싶으면 또 하나 터지고…. 요즘은 정말 뉴스 보기가 겁난다.” 한 유통 중견기업 간부의 말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유통분야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갑질과 통행세, 일감 몰아주기 등이다. ‘기업들의 수난시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본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국세청이 재벌 기업의 경영권 편법승계에 대한 정밀 검증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지배구조가 2세와 3세로 재편되는 중견 유통기업으로 이목이 쏠리고 있다. 자산 5조원 미만 중견기업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지 않기 때문에 회사 규모가 더 크기 전에 승계 작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제조업체를 거느린 유통기업은 계열사 간 내부거래가 흔히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일감을 몰아주는 방법 등으로 부를 이전, 편법승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국세청이 칼을 든 것이다.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을 통한 편법승계를 막겠다는 국세청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 국세청은 5월16일 “정상적인 거래까지 전방위로 검증하는 ‘저인망식’ 조사가 아닌, 사주 일가의 편법 상속·증여 혐의에 집중해 철저히 검증하는 ‘현미경식’ 조사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사실상 편법승계 의혹을 받고 있는 기업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국세청이 중견기업의 경영권 편법승계에 대한 정밀 검증을 예고해 주목된다. 사진은 박문덕 하이트진로그룹 회장(왼쪽)과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 ⓒ연합뉴스


 

최근 편법승계 논란이 일었던 유통기업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가고 있다. ‘세금 한 푼 안 내고’ 오너가 3세에게 경영권 승계 작업을 완료했다는 지적을 받는 사조그룹이 그중 하나다. 사조그룹은 현재 오너가 2세인 주진우 회장 장남 주지홍 사조해표 상무가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사조시스템즈(39.7%)를 통해 사조산업을 지배하고 사조산업이 사조해표, 사조대림, 사조동아원 등 주요 계열사를 지배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주 상무에게 그룹의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사조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은 육가공업, 참치통조림 판매업 등을 하는 사조산업이다. 지난해 매출액은 8160억원(연결 기준)으로 계열사 중 가장 많다. 현재는 주 상무가 최대주주로 있는 사조시스템즈가 사조산업의 최대주주(지분 23.75%)지만, 4년 전만 해도 사조시스템즈의 사조산업 지분은 1.97%에 그쳤다. 

 

문제는 사조시스템즈의 매출 대부분이 특수관계에 있는 계열사를 통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사조시스템즈의 매출 345억원 중 75%인 약 260억원이 계열사로부터 발생했다. 주 상무의 그룹 지배력을 높이는 데 계열사가 동원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사조시스템즈가 계열사에서 몰아준 일감으로 수익을 내고, 그 돈으로 사조산업의 주식을 매입한 부분도 논란의 대상이다. 사조시스템즈가 사조산업의 지분을 24% 가까이 끌어올리는 동안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은 그룹의 지배력을 높인 주 상무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속세 없이 사조그룹의 주인이 됐다. 세무업계 관계자는 “사조의 경영권 승계는 편법이기는 하나 불법은 아니다. 현행법으로 규제하기 힘든 상황”이라면서도 “과세 당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견기업의 편법승계 시도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최근의 강경 기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 초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처분을 받은 하이트진로 역시 편법승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정위는 하이트진로 총수 일가 소유 회사인 서영이앤티에 지난 2007년 4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대규모 일감 몰아주기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비상장사인 서영이앤티는 2016년 말 기준 2세인 박태영 부사장(58.44%)과 박문덕 회장(14.69%) 등 친족 일가 지분만 99.91%에 달한다. 

 

국세청 관계자는 “국민적 공분을 야기하는 대기업 사주 일가의 경영권 편법승계, 기업자금 사익편취 등 비위(非違)행위에 대해 공정위·금융위 등 유관기관과 상시 정보교환 채널을 구축하고 정보공유를 확대하는 등 긴밀히 공조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감 몰아주기’ 옛말?…편법승계 꼼수도 진화 중  

 

총수 일가가 지분을 갖고 있는 비상장 회사에 계열사들이 일감을 몰아주고, 이렇게 키운 회사로 그룹을 지배하는 편법승계는 강화된 당국의 감시와 거세지는 사회적 비판으로 점점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뜨는 기업 승계 방안으로는 오너가 설립한 ‘투자 전문회사(지분 관리회사)’가 승계를 위한 회사의 지분을 매입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공시 부담도 덜 수 있고 주식 증여 사실 역시 외부에 알리지 않고 승계 작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방식을 통한 기업 승계는 이미 국내외에서 시도되고 있다. 독일의 BMW그룹 최대주주인 요한나 콴트(Johanna Quandt)는 승계를 목적으로 한 비상장회사(지분 관리회사)를 통해 2003년부터 2008년까지 6년에 걸쳐 비공개로 자녀에게 지분을 증여했다. 이런 BMW의 승계전략은 2015년이 돼서야 외부에 알려졌다. 

 

국내의 유사 사례로는 세아그룹의 지주회사인 세아홀딩스가 꼽힌다. 오너가(家) 3세인 이태성 세아홀딩스 부사장의 개인 회사인 에치피피(HPP)가 세아홀딩스의 지분 5%를 사들였는데 업계는 이를 두고 경영승계를 위한 신호탄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진행된 에치피피의 유상증자(99억8100만원)에 이 부사장이 전액 참여하면서 이런 분석에 더욱 힘이 실리는 상황이다. 기업컨설팅 경험이 많은 한 회계사는 “투자 전문회사 등을 통한 기업 승계 시도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며 “이런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면 단계만 한 단계 늘어날 뿐 기존 일감 몰아주기와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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