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트럼프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 이철재 미국변호사 (sisa@sisapress.com)
  • 승인 2018.06.1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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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변호사가 보는 재밌는 미국] 협상의 기술: 역사의 운율을 꿰뚫어 볼 때

 

미국에서 로스쿨에 진학 했을 때 첫날 오리엔테이션에서 학장님이 했던 말씀을 기억한다. 법정에 나가 의뢰인을 열성적으로 변론하여 재판에 승리하는 것도 변호사의 중요한 임무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정에 갈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즉 계약서를 작성할 때 냉철하게 협상하고, 철저히 검토하여 아예 분쟁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늘 기억하고 있다.

 

국가 간의 국제 협약 혹은 조약은 일종의 계약이고 정상회담은 그 협상의 일환이다. 협상자들은 그들이 변호사이고 국민이 의뢰인이라는 생각으로 의뢰인 즉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안전하게 협상에 반영하고자 노력해야한다. 시작은 좋은 마음으로 했고, 서로 속일 마음이 없더라도 언어라는 것이 각자의 주관에 따라 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 분쟁이 생기고, 서둘러 협상을 체결하느라 이런 분쟁을 예방하고 해결할 문구들을 생각하지 않아 결국 싸움만 하다 협상 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6월12일 북·미 정상회담이 끝난 뒤 싱가포르 카펠라 호텔에서 기자회견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EPA

 


협상할 땐 분쟁의 소지 아예 없애야

 

미국과 북한 간의 협상에 우리 대한민국은 중간에 끼어있다. 가장 중요한 종전선언이나 핵 폐기 문제에 있어 미국과 북한의 협상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2018년 6월12일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손꼽아 기다렸다. 트럼프 자신이 스스로 협상의 달인이라고 칭하고 다니니 그의 화려한 개인기를 기대해 본 사람들도 적지 않다. 회담이 끝나면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빈약했다. 

 

첫째, 협상의 기본은 용어·기간·​방식의 정확한 정의이다. 비핵화가 정확히 무슨 뜻이며 그 정확한 의미의 비핵화를 대충이라도 몇 년 이내에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어떻게 증명하겠다는 대충의 로드맵이라도 들어있어야 세기의 공동 선언문의 격에 맞을 것인데,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선언문에는 판문점 선언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비핵화 노력에 대한 원론적인 표현이 전부이다. 

 

또한 이 선언문에는 북한 인권에 관한 문제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한 미국의 기자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에게 북한의 인권 문제를 논의 했냐고 물었더니 트럼프의 대답은 “매우 간단히 했다“였다. 기자가 다시 오토 윔비어에 대해 질문하자 횡설수설하며 “오토 없이 오늘이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형제와 친척을 죽이고 수많은 민간인을 수용시설에 가두고 있는 그를 왜 재능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그 나이에 나라를 맡아 이만큼 터프(tough)하게 이끄는 사람이라면 재능이 있다고 본다”는 답변이 나왔다.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닌, 협상 기술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 

 

우리가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가장 받아내길 원했던 핵무기 포기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넘어가고, 인권 문제는 아예 제대로 거론도 하지 않은채 미국이 줄 것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 물론 직접적인 협상 내용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주한 미군을 하루빨리 미국으로 데려오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한·​미 연합 훈련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돈을 아끼겠다는 이유다. 거기다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업자 답게 북한의 아름다운 해변들을 개발해 서방에 개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까지 내 놓는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아니다. 협상의 기술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이다.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 합동 훈련 중단, 경제 협력 등은 이루어질 때 이루어지더라도 협상 중에 지레 꺼내 건네줄 카드가 아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두 쪽짜리 공동선언문을 읽으며, 이럴 바에는 무엇하러 지금 정상회담을 하나, 차라리 실무 협의를 좀 더 거쳐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고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정상회담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만나기만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대한 트럼프의 대답은 확실하고 간단했다. “시간이 없어서”였다. 시간이 없으면 시간을 두고 합의점을 찾아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순서이나, 그는 그냥 무작정 싱가포르로 향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우리의 기대와 너무도 차이가 나는 결과가 나왔을까? 그 이유는 우리가 트럼프를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트럼프가 별다른 어젠다도 없이 싱가포르로 간다는 우려는 꾸준히 있었고 회담 전날도 그 점이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던 것이었다. 트럼프에게는 누구누구와 서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는 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국의 이익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역대 미국 대통령이 아무도 하지 못한, 혹은 정책적 이유로 하기를 거부한,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 찍은 사진을 11월 중간 선거 때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자랑스럽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아직 과제가 산제해 있어도 지금 당장 만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주한미군 철수나,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한·​미 연합 훈련을 중단하겠다는 말도 모두 자신의 지지층을 겨냥한 발언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트럼프는 국내에서 궁지에 몰려있다. 그는 북한에 비해 훨씬 초보적 단계에 있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감시할 이란 핵 협상을 아무런 대책 없이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그것도 함께 협상을 했던 당사국인 우방국들의 간청을 묵살하고 파기했다. 그도 모자라 싱가포르 회담 직전 그는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오랜 우방국 정상들을 모욕주고 언성을 높여 말다툼을 하곤 일찍 떠나버렸다. 또한 로버트 멀러 특별검사의 수사가 점점 자신을 죄어오고 있다. 

 

이런 미국 국내외 상황이 그가 사진을 찍어 중간선거에 활용해야겠다고 집착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그는 전직 대통령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파기하기만 한다는 비판을 돌릴 한 장의 사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김정은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얻을 수 없던 것을 얻었다. 서방 세계의 지도자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나란히 서서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제 국제 사회에서 북한은 미국 국가원수와 일대일로 만나 회담하는 상대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한국엔 별 이득이 없는 북·미 정상회담

 

분명 불과 몇 개월 전의 긴장감 돌던 트럼프와 김정은의 설전에 비하면 정상회담은 그 자체만으로도 발전이다. 그러나 협상과 계약이라는 측면에서 미국과 대한민국에게는 별다른 득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비핵화도, 종전도, 평화를 위한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얻어낸 것이 없는데, 트럼프는 사진 잘 찍고, 폼페이오가 앞으로 실무 협상을 할 것이라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기분에 따라 출렁이는데 국무장관 폼페이오가 어떤 협상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앞으로 유엔 등 국제기구의 협력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그에게 모욕당한 서방의 정상들이 과연 트럼프를 도와 함께 일을 할지도 확실치 않다. 중간 역할 밖에 할 수 없는 우리의 입장이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협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부터 냉철히 반성하고, 가다듬고, 앞으로 제대로된 실무 협상을 이끌어 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간 모든 것을 너무 성급히 장밋빛으로 덧칠하고 바라본 것은 아닌지. 같은 민족이라고, 우방이라고 그저 덥석 믿고 좋아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때이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얼마 전 정치 소설을 출간한 CNN의 유명한 앵커 제이크 태퍼가 그 책에 관한 인터뷰 중에 역사는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운율이 맞는다(History rhymes)라는 말을 했다. 역사는 똑같은 일이 반복하지는 않지만 시대가 다르고 그 안에 등장인물이 다르고 상황이 조금씩 달라도 그 안에 흐르는 운율 즉 줄거리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북한과 조금이라도 상황 진전이 있으면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트럼프도 같은 표현을 썼다.

 


"신뢰하라, 그러나 확인하라."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평양을 갔을 때 우리 모두 눈물을 흘렸다. 10년 전 북한이 영변 냉각탑을 폭팔 시켰을 때는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감격을 뒤로 하고 2018년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어 미국 앞에 동등한 회담 상대국으로 나섰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운율이다. 늘 역사적 사실들을 뒤돌아보면서 어디서 실패했는지, 왜 오늘날까지 한반도 평화 문제가 지지부진한지 따져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제대로 세워 봄직하다. 역사를 모르는 자는 순간을 전부로 생각해 감흥에 젖지만, 역사의 운율을 아는 자는 운율을 타고 방향을 바꾸며 수평선 너머로 항해할 수 있다. 

 

협상의 기술은 이제부터 우리가 발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중간에 서서 우리의 비젼을 향해 북한과 미국의 실무 협상자들을 이끄는 중재자의 입장도 협상의 기술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한마디가 귀에 남는다. “신뢰하라 그러나 확인하라. (Trust but verify.)” 모든 협상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철재 변호사 sisa@sisapress.com

 

- 미국 샘휴스턴 주립대학교 사회학 학사

- 미국 포드햄 대학교 사회학 석사

-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법학 박사

- 現 미국 뉴욕주 변호사

-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영어책>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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