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국 노인에게 뿌려진 ‘이중근 석방’ 탄원서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18.07.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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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근 부영회장 탄원서, “혐의 안 알리고 서명 모았다”…‘사문서 위조’ 가능성도 제기돼

 

4300억 원대 횡령과 임대주택 비리 혐의 등으로 구속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이 7월19일 보석으로 석방됐다. 구속된 지 161일 만이다. 그 사이에 석방을 요구하는 대량의 탄원서가 법원에 접수됐다. 그런데 탄원에 동참한 일부 사람들은 이 회장의 혐의를 듣지도 못하고 서명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때문에 사문서 위조의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수천억 원대 횡령·배임과 임대주택 비리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됐다 보석으로 석방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이 7월23일 오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는 4월25일 시내 25개구 지회에 ‘이중근 회장 탄원서 서명 요청 알림’이란 제목의 공문을 돌렸다. 이 회장은 대한노인회 회장을 겸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해당 공문을 입수했다.

 

여기엔 “이중근 회장의 최근 사태와 관련해 대한노인회의 발전과 노인권익신장 및 복지증진을 위한 업무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특별한 배려와 선처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최근 사태’가 뭐고, ‘배려와 선처’는 뭘 뜻하는 건지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탄원서 쓴 일부 노인, “이 회장 혐의는 모른다”

 

노인회 서울 지회장 중 한명인 A씨는 7월23일 “이 회장의 잘못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는 반쪽짜리 공문”이라며 “그저 탄원서만 모으면 된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이어 “공문의 뜻에 동의할 수 없어서 아예 경로당에 전달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탄원서에 서명했다는 지회장 B씨도 이 회장의 혐의나 구속 사유를 묻는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이 회장의 잘못 여부는 법원이 판단할 내용인데, 탄원서가 도움이 된다면 뭐 다행이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지회장 C씨는 “경로당 노인들은 탄원서가 뭔지도 모르고, 서명을 왜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탄원서의 효력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이중근 회장 탄원서 서명 요청 알림' 공문.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가 시내 25개 지회에 전달했다. ⓒ 시사저널 공성윤


 

 

대한노인회 서울연합회를 포함, 전국 시․도 연합회 16곳은 모두 노인회 중앙회로부터 탄원서 요청을 지시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연합회도 그 중 하나다. 부영 임대아파트 입주민 모임 ‘부영연대’의 충북 청주지역 대표 김종근씨는 7월23일 “4월 말에 어르신들 사이에서 내용도 없는 탄원서 서명부가 돌았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청주 금천동의 한 할머니는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 등을 요구하는 문서를 집에 들고 왔다고 한다. 탄원서였다. 노인의 아들은 “어머니가 탄원서의 목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의심이 가니 서명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김씨는 “사리분별을 제대로 못 하는 노인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탄원서를 모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인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대한노인회가 탄원서를 요청한 대상 중에는 노인대학 학생도 포함돼 있다. 전국 총 332곳의 노인대학은 대한노인회 산하에 있다. 

 

인천 서구 노인대학생 이춘자(81·여)씨는 7월24일 “수업 중에 학장이 들어와서 ‘이중근 회장이 구속돼 있는데 우리가 탄원서를 모아 내면 쉽게 나올 수 있다’며 탄원서에 사인해달라고 부탁했다”면서 “이 회장의 혐의에 대해선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이씨는 “나를 포함해 몇몇 학생들은 ‘잘못을 했으니 구속된 것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결국 다른 학생들에게 서명을 받아 갔다”고 지적했다. 

 

한편 시사저널이 입수한 탄원서 요청 공문에는 ‘서명요청인원 : 각 지회별 3000명’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 지회는 총 25곳이니, 서울에서만 7만 명이 넘는 노인에게 탄원서를 요청한 셈이다. 

 

 

대한노인회 서울시 회원들이 받았다는 탄원서 서명부.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서명을 적어 내도록 돼 있다. '총 133명 작성'이란 문구가 오른쪽 상단에 보인다. 이름이 가려진 사람들은 경로당 회장들이라고 한다. ⓒ 시사저널 공성윤


 


“탄원서 서명부 수천 장쯤 된다”

 

이렇게 모인 탄원서는 5월 말 법원에 접수됐다. 이 회장의 보석심문을 진행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관계자는 “탄원서에 서명한 인원이 총 몇 명인지는 밝히기 곤란하다”며 “서명부는 수천 장쯤 된다”고 했다. 

 

변호사 최아무개씨는 “탄원서의 목적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서명을 받았다면 사문서 위조죄에 해당될 수 있다”며 “이는 형법상의 책임을 따로 물어야 될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사문서 위조죄가 인정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탄원서 요청 공문에 관해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 관계자는 7월23일 “일부 노인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탄원서의 목적에 대해) 설명을 드렸다”고 했다. 이어 “공문의 취지에 대해선 적혀있는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일축했다. 김광홍 노인회 부회장(전 제천시장)은 7월26일 "탄원서 모집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는 "이 회장의 혐의가 노인회와 관련 없는 사안들이고, 300만 노인 회원들의 대표가 불행한 일에 휘말린 점을 눈감을 수 없어 좋은 뜻으로 추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노인회장 자리를 방패막이로 활용하려 해”

 

이 회장의 석방을 두고 이영철 부영연대 대표(전 김해시의원)는 “대한노인회장 자리를 방패막이로 활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셈”이라고 비판했다. 본지는 이 회장이 대한노인회장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수억 원을 뿌렸다는 의혹에 대해 지난해 9월 단독 보도한 바 있다. (시사저널 1457호(2017년 9월22일자) ☞[단독] “이중근 부영 회장, 대한노인회장 선거 때 돈 뿌렸다” 기사 참조) 

 

이 회장측은 탄원서와 함께 보석금 20억원을 법원에 냈다. 병원 진단서도 제출했다. 만성질환인 강직성 척추염이 크게 나빠졌다는 주장이다. 결국 재판부는 석방을 허락했다. 초호화 변호인단의 영향 덕분이란 시각도 있다. 이 회장측 변호인단은 김능환 전 대법관과 의사 출신 유지현 변호사, 채동욱 전 검찰총장 등 20여명으로 꾸려져 있다. 

 

일각에선 수천 장의 탄원서가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탄원서에 자필로 사유를 적지 않고 서명만 모아 제출할 경우, 재판부는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7월23일 불구속 상태로 서울중앙지법 18차 공판에 출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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