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돈②] 노회찬·정치 집어삼킨 괴물 ‘정치자금법’
  • 김종일·이민우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27 13:36
  • 호수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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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선 투명정치 뒤로는 불법 강요…관련 제도·문화 개선 시급

 

정치자금의 굴레를 피해 가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을 계기로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 등 관련 규정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현행 제도가 정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현역 국회의원과 거대 정당에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으니 이번 기회에 정치자금의 한도를 높이는 대신 신고와 집행 과정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 전환을 이루자는 주장이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자금법은 스스로 탄생한 괴물이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요구를 받들어 직접 설계하고, 심의하고, 투표해서 만든 법이다. 당시엔 혁신안이었다. 지금의 정치자금법은 당시엔 ‘더 깨끗한 정치’ ‘더 투명한 정치’로 가는 지름길처럼 여겨졌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법’이 된 걸까? 

 

현 정치자금법의 모태가 된 이른바 ‘오세훈법’은 2004년 개정됐다. © 연합뉴스


 

불행의 씨앗, 신뢰받지 못하는 정치 

 

법은 형식이다. 형식은 철학을 반영한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어떤 요구와 생각’을 받들어 법과 제도를 만들고 바꾼다. 지금의 정치자금법은 국민들의 어떤 요구와 생각의 결과물이었을까? 

 

답은 바로 ‘신뢰하지 않는 정치’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인들만큼 신뢰받지 못하는 집단은 없다. 국민들은 정치 자체를 신뢰하지 않고, 정치인들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신뢰하지 않으니 신뢰하지 않는 만큼 강한 규제를 요구한 것이다. 통계청이 발간한 ‘2017년 한국 사회 지표’에 따르면, 국회는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에서 4점 만점에 1.8점을 기록해 조사 대상 중 유일한 1점대를 기록했다.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가 2003년부터 진행해 온 한국종합사회조사에서 국회는 신뢰도 부문에서 단 한 번도 꼴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국갤럽의 ‘2017년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에서도 국회는 가장 낮은 수치인 15%를 받았다. 국민들이 그토록 싫어한다고 여겨지는 신문사(39%), 대기업(31%), 검찰(31%)과도 큰 차이가 났다. 

 

국민들의 정치 혐오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고인이 된 노 의원이 정치학자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에게 한 말로, 박 학교장의 저서인 《정치의 발견》(19~20쪽)에 소개돼 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진보정치가라고 할 수 있는 노회찬씨에게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근소한 표차로 떨어진 직후의 일이었다고 한다. 우연히 길을 가다가 지역구 주민이자 평소 자신을 열성적으로 지지해 주었던 젊은 부부를 만났다. 그런데 그 부부가 하는 말이, 자신들은 노 후보가 당선되어 정치인이 될까 봐 걱정해서 내심 떨어졌으면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실제로 떨어지고 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노회찬씨는 상상도 못 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이 젊은 부부는 “노회찬씨를 신뢰하고 지지하지만 그래도 그가 정치인이 되지 않았으면, 그래서 정치에 오염되지 않았으면 했다”는 복잡한 심리를 밝혔다고 한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제도권 여의도에 들어가면 ‘오염’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이런 생각이 바로 노 의원을 옭아맸다고 지적받는 ‘정치자금법’을 만들어낸 ‘국민들의 어떤 생각과 요구’의 총체다.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으니, 믿을 수 있게 더 많은 규제를 요구한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논란은 ‘정치 혐오’가 극대화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연합뉴스


 

‘차떼기→정치 혐오→정치 축소’ 악순환

 

그렇다면 언제부터 정치는 이렇게 불신의 대상이 된 걸까. 어느 나라나 정치권에 대한 신뢰는 높지 않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는 분명한 변곡점이 있었다. 이른바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 논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02년 대통령선거 당시 한나라당(현재의 자유한국당)이 거액의 대선 자금을 ‘차떼기’ 형식으로 대기업으로부터 건네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자 화가 난 국민들은 정치권 전체에 ‘정경유착 퇴출’과 ‘돈 정치 중단’을 강하게 요구했다. 국민들의 성난 여론에 정치권은 화들짝 놀라 2004년 정치자금을 강력하게 규제하는 내용이 담긴 정치자금법을 개정했다. 

 

‘차떼기’ 사건은 여러모로 비극적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역시 한국 정치판은 더럽고 부패했다’는 인식이 상식처럼 굳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한국 사회에는 ‘정치 혐오’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한번 굳어진 ‘정치 혐오’ 현상은 차떼기 사건 이상의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정치 참여는 물론 정당이나 정치인을 후원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지게 됐다. 진보적 지식인들도 정당에 가입하는 일을 꺼렸다. 직업 정치인으로 선거에 출마하는 행동은 주변에서 말려야 하는 일처럼 돼 버렸다. ‘정치적이다’라는 말은 ‘욕’처럼 들리게 됐다.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은 정치를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나갔다. 정치자금법 개정이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이른바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2004년 정치자금법 개정의 골자는 지구당 불법화 등 정치활동 축소와 함께 정치자금의 제한이었다. 이에 따라 법인·단체의 정치자금 기부 행위는 원천적으로 금지됐다. 중앙당 후원회도 폐지(2017년 부활)됐다. 정치인 개인의 집회성 후원모금 행사도 금지됐다. 오직 개인으로부터 정치인 후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받도록 했다. 개인당 납입한도는 1억20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축소됐다. 개인당 한 국회의원에게는 500만원을 초과해 기부할 수 없게 됐다. 한마디로 선거자금을 모으는 데 있어 불법의 한계를 최대로 확장해 놓은 것이다. 

 

개정된 정치자금법은 ‘신종 금권정치의 시대’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무엇보다도 돈 없는 후보들의 출마를 배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노동조합을 통한 정치자금 기부는 금지됐고, 사회 하층의 유권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를 돕기 위해 모금을 할 때 늘 선거법을 의식해야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남의 돈이라도 동원할 능력이 있는 이들만 정치를 할 수 있게 됐다.

이 와중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점점 선거를 축제가 아닌 ‘규제 백화점’처럼 만들어 버렸다. 우리 선거법은 가능한 것을 법률에 적어놓은 ‘포지티브 방식’인데, 현실과 맞지 않는 규정이 지나치게 많다. 대표적으로 선거 때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을 만나기 위한 가가호호 방문은 불법이다. 이런 규제가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시민단체 등에서 안 되는 것만 규정하고 나머지는 기본적으로 허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개정을 끊임없이 촉구했지만 거북이걸음을 거듭하고 있다. 

 

정당들은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 비전과 공약을 설명할 기회를 빼앗긴 채 여론조사와 새로운 마케팅 기법 등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수단에 점점 의존하기 시작했다. 정당들이 새로운 선거 기법에 매달릴수록 정치자금의 필요성은 오히려 점점 늘어만 갔다.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금과 조직이 필요한데,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는 통로는 제한돼 있으니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더 많은 정치인들이 불법 정치자금으로 조사받고 구속되기 시작했다. 20대 국회에서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거나 수사 및 재판에 계류 중인 사건만도 10건이 넘을 정도다.

 

 

노회찬도 못 지킬 법, 이젠 개정해야 

 

정치에는 돈이 든다. 정치권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재 정치구조 속에서 정치활동을 해 나가려면 ‘고비용’은 불가피하다. 지역구 사무실 및 관리 비용과 인건비는 기본이다. 여기에 정책개발비, 민원인들을 만나는 밥값과 찻값이 필요하다. 선거를 앞두고는 차량 운행비와 선거 명함, 현수막, 문자 메시지 발송비 등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국회 보좌관 경험이 있는 최병천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는 정치를 하려 해도 돈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생활비, 사무실 유지비용과 상근자 급여, 활동비 등을 감안하면 월 단위로 최소 500만~3000만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낙선하기 마련이다. 낙선하면 이런 비용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는다. 노 의원이 김동원(필명 ‘드루킹’) 쪽 도아무개 변호사에게 돈을 받은 시점은 2016년 3월이다. ‘삼성 X파일 폭로’ 대법원 판결로 19대 의원직을 상실하고, 20대 총선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나마 현역 의원들은 임기 내내 후원금을 모아 선거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 정치자금법상 후원금을 모집할 수 있는 자격은 국회의원이나 국회의원 예비후보, 지방자치단체장 후보, 대통령 후보 및 예비후보 등이다. 지방의원이나 지방의원 후보자들은 후원금을 모을 수 없다. 국회의원 예비후보는 총선 120일 전에야 예비후보 등록을 할 수 있다.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낙선한 경험이 있는 한 정치권 관계자는 “정치 지망생에게도 후원금 창구를 열어줘야 공정한 게임”이라며 “낙선한 뒤에도 다음 선거까지 지역에서 활동하려면 정말이지 가혹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유혹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정치권에서는 정치자금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7월25일 “노 의원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해 정치자금법 개정 필요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고 있다”며 “모금과 집행의 투명성 제고를 전제로 해서 정치자금 현실화 및 정치신인의 합법적 모금 등의 내용을 담은 정치자금법 개선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고비용의 정치는 분명 지양해야 하지만, 현역 의원이나 정치신인들이 불법 자금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제도 개선도 입법자의 책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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