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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평등이 아닌 생존의 문제입니다

내 삶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3(Mon) 11:11:24 | 15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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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장이 나를 포획했다.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살펴보아야 할 구석구석 수많은 장소들을 제쳐두고, 이번 주도 성범죄 동영상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진 한 장. 높이 쳐들린 피켓에 쓰인 글은 이러하다. 

 

“몇 년 전 한 줌의 재가 된 내 친구는 어째서 한국 남자들의 모니터 속에 XX대 XX녀라며 아직 살아 있는가.”

 


 

지난 주말 광화문광장에 등장한 피켓이다. 벌써 네 번째를 기록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의 핵심을 이보다 잘 요약할 수 있을까. 여성들은 딱 읽으면 아는 이 문구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남성이 설마 있으랴 싶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해설을 한다. 어떤 경로로 촬영되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알몸이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알게 된 이 위선적 도덕사회의 젊은 여성이, 그 동영상들과 싸우다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한 여성이 죽고, 또 한 여성이 죽고, 영상은 삭제되었다가 ‘유작’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여 또 돌아다니고, 누군가가, 아니 누군가라 하기에도 거북한 압도적 숫자의 남성들이 소위 ‘일반인 동영상’이라는 이름의 사이버 성범죄 동영상을 값싼 오락물로 다운로드해 소장하며 낄낄거린다. 당사자가 죽음으로 거부하고 항의했던 바로 그 영상을.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런 동영상 탐닉자라면, 그래서 이 글이 당신을 비난한다는 느낌에 반성 대신 분노를 더 많이 느낀다면, 악플을 백만 개쯤 달라. 대신 저 문구를 입으로 외워봐 달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깨달을 때까지 입속에서 굴려봐 달라. 당신의 모니터 속에 ‘XX대 XX녀’로 등장하는 그 사람이, 바로 그러한 당신의 행위 때문에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각성해 달라. 고작 동영상 좀 본 일이 알고 보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되고 만다는 그 정확한 연결지점을 저 문장은 말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과년한 아들을 둔 부모라면, 제발 자식의 컴퓨터를 한 번만 살펴보시라. 그런 것을 검열이라 생각하지 마시라. 자칫하면 당신은 건강한 사회인이 되어 이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갈 능력을 기르는 데 바쁜 아들 대신, 잠재적 살인에 공모하고도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정신파탄자를 가족으로 두게 된다. 길게 대화하시라.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라는 게 아니다. 인간 존중의 최소한을 이야기하시라는 거다. 

 

더불어 살아갈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삶 그 자체를 파괴하는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요구가 어찌 페미니스트들만의 일이겠는가. 그 수단이 성범죄라 해서 모든 것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만 단죄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의 ㅍ자도 몰라도, 그런 개념이 생겨나기 전 시대에도, 그런 일은 잘못이었다.

 

참으로 안타깝다. 서로를 존중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뤄내어 점점 힘들어지는 경제 환경을 인간답게 헤쳐 나갈 고민을 함께해야 할 청춘들이 피해자와 가해자로 서로 부딪쳐야 한다. 나는 이 고통이 오랜 정치적 분단 상태, 잠시 쉬고 있는 전쟁의 끄트머리 우리 역사의 탓이라고 거창하게 탄식하고 싶지만, 또 조그맣게도 말해야 할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인 층위에서 인간답고자 하는 몸부림의 이름으로, 페미니즘적 평등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 달라고. 매우 ‘국가주의’적으로도 요청해 본다. 국가가 해결하라. 제발 해결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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